사유의 편린

허수아비

아나빔 2015. 9. 28. 22:56
나도 그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내가 눈길을 거두면 너는 그 사이에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기지개를 펴고 있을테지. 고개를 재빠르게 돌리면 쑥스러운듯 베시시 웃는 얼굴을 맞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가던 길을 멈추고 연방 뒤를 돌아다보았지만 떼로 날아와 눈알을 뙤룩 굴리는 참새 떼를 쫓느라 허수아비는 빡지근한 허리를 뒤틀어보지도 못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논두렁을 거닐며 벼 이삭을 돌보고 너무 긁어서 진집이 생긴 등에 약을 발라주기도 하다가 태풍이 몰아칠 때면 쓰러진 벼들 세워주느라 허리 휘는 줄 모르던 네 행색이 지금은 참으로 헙수룩하구나.

황금빛 풍요의 벌판 한복판에서 어느 틈에 사위어버린 네 모습이 느꺼워 가슴이 아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