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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3. 시선, 그 끝에 와 닿는 모든 것을 객체로 사로잡아버리는 강력한 힘

아나빔 2023. 4. 3. 07:58

“내가 문제의 사람을 ‘인형-객체’로 취급할 경우, 나는 그에게 사물에게 적용하는 시공간적 범주들을 동일하게 적용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내가 문제의 사람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여길 경우 사정은 복잡해집니다. 우선 이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가 나의 세계 내에서 형성됩니다. 또한 나의 세계는 그가 중심인 극점極點을 향해 유출됩니다. 사르트르는 이 유출을 나의 세계에서 발생한 ‘내출혈hémorragie interne’로 규정합니다. 물론 내출혈이 계속되면 나는 점차 세계의 중심 위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의 세계에 인간이 출현하는 것은 나의 세계를 훔쳐가는 하나의 특수한 존재가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사르트르는 이런 의미에서 타자의 출현을 나의 세계 속에 생긴 ‘하나의 작은 균열une petite lézarde’, 곧 거기를 통해 나의 모든 세계가 빠져나가는 ‘배수공’의 발생으로 봅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이와 같은 균열의 발생과 그것을 통한 나의 세계의 내출혈은 나에 의해 원상태로 회복이 가능하다는 게 사르트르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②에서처럼 내가 타자에 의해 응시凝視당한 경우에 사정은 전혀 달라집니다. 우선 나의 세계의 내출혈은 끝이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나의 세계는 타자에 의해 완전히 해체됩니다. 타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가 나의 세계 위로 와서 겹치게 되고, 그 결과 나는 그 세계의 중심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제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중심인 타자로부터 객체의 자격을 부여받게 됩니다. 또한 타자에 의해 ‘응시당한 나의 존재mon être-vu’는 결코 내가 알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합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 존재는 나의 ‘가능성’에 속하지 않으며, ‘카드의 안쪽’이라는 의미에서 타자의 ‘자유의 안쪽’임과 동시에 나의 ‘자유의 한계’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나의 ‘즉자 존재’로서의 모습이며, 또한 이것은 정체와 무게를 알지 못한 채 내가 짊어져야만 하는 ‘짐fardeau’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르트르에게서 시선은 나에 대한 타자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현전現前을 가능케 해주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시선의 의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 시선은 단순히 두 눈동자의 움직임이 아닙니다. 시선은 ‘힘puissance’입니다. 그것도 그 끝에 와 닿는 모든 것을 객체로 사로잡아버리는 강력한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