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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우, '갈멜산 승리 패러다임은 역사 속에서 반복되지만'(<너는 어찌 여기 있느냐> 중에서)

아나빔 2019. 7. 2. 21:41

엘리야는 분명히 방심한 것 같다. 역사는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갈멜 사건 이후,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백성들은 거국적으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것이다. 백성들은 바알 신들과 선지자들을 내어 쫓고 주님께러 온전히 돌아와 나라를 갱신할 것이다"라는 그의 기대는 너무나 단순한 장미 빛 꿈에 불과하였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은 회개하지 않았다(19:1-2). 오히려 그는 부흥의 주역인 엘리야 선지자의 목숨을 노렸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역사에서 반복되는 일이다. 예수님 당대의 무리들은 그의 기적을 보았고 하늘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요 12:28).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요 12:37). 예수님은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자기 말을 믿기 어려우면 자신이 행하는 기적을 믿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를 붙잡아 죽이려고 하였다(요 10:38). 죄로 무뎌진 마음과 어두워진 눈은 하나님의 일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다(사 6:10). ​갈멜산 승리는 역사 속에서 거듭 일어나는 부흥운동으로 반복되지만 악은 여전히 세상에 넘친다. 사실 엘리야의 승리는 악을 결정적으로 쳐부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후에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일이었다. ​십자가의 승리 후에도 가라지와 알곡은 함께 자라다가 최후에 추수로 나누어질 것이다(마 13:24-30). 우리가 이 사실을 잊을 때 쉽게 절망하게 된다. 한 때 엘리야는 사자같이 담대하였다. 그는 악과의 싸움에서 승리의 절정에 섰다. 그는 주님의 능력에 붙잡혀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렸다. 그러나 이세벨의 한마디에 그는 도망친다. 마치 태양이 먹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것 같다. 전열을 가다듬은 이세벨의 악한 괴력을 보고 엘리야는 두려워한다. 치를 떠는 이세벨을 보고 놀라 도망치는 엘리야의 모습은 한 계집 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동일하다(요 18:17). 이런 모습은 바로 탈진한 사역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 김정우, <너는 어찌 여기 있느냐>, 너는 어찌 여기 있느냐,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도망치는 엘리야, 1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