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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교, '윤동주 「팔복」과 본회퍼의 은밀한 비범성'

by 아나빔 201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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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팔복」과 본회퍼의 '은밀한 비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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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1917~1945)와 본회퍼(Bonhoeffer, Dietrich, 1906~1945).
두 사람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부자집 아들이며 결혼하지 못하고 옥에서 사망했다. 키에르케고어를 엄청 좋아했던 두 사람의 글 속에는 키에르케고어의 영향이 너무도 깊다. 두 사람 모두 1945년에 투옥생활 중에 사망했으며, 사후 영원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살아있는 영혼의 스승이 되었다. 윤동주는 3월 16일 후쿠오카 구치소에서 옥사했고, 본회퍼는 4월 9일 플로센뷔르그 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 윤동주와 본회퍼를 비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뭔가 안 어울리는 표현 같다. 비범하다는 표현은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닐까.

"비범(非凡)하다"라는 말은 '평범한 수준보다 훨씬 뛰어나다'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extraordinary, uncommon, unique 등으로 쓸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뛰어난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인 용례는 아래와 같다.
ㅡ 율곡은 어릴 때부터 유달리 총명하여 비범한 앞날이 미리 내다보였다.
ㅡ 홍길동은 비범한 능력을 지닌 영웅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ㅡ 비범한 재능을 소유한 그는 장래가 촉망된다.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를 읽으면 이 '비범성'이란 단어가 자주 나온다. 뭔가 세속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뜻할 때 우리는 비범하다고 쓴다. 아닌게 아니라 본회퍼의 삶을 보면 비범하게 느껴진다. 간단히 정리하면, 17세 때 튀빙엔 대학 입학(1923년), 21세 때 박사학위 취득(1927년), 23세 때 교수 자격 취득(1929년)이다. 과연 비범하지 않은가. 과연 이것이 비범한 이유일까?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하는 '비범성'은 화려한 약력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는 전혀 다른 '비범성'을 한다. 삶의 나침판이 가르키는 방향이 전혀 다른 것이다. 본회퍼에게 비범성은 머리가 똑똑하거나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에게 인간의 '비범성'이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행동이며 예수의 뜻에 단순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실로 황당한 비범성이 아닐 수 없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더 낮은 데로 내려가는 몰락(untergehen)의 비범성이다. 가령 본회퍼는 원수 사랑을 비범성이라고 하였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적대감을 극복하여 원수의 존재가 소멸되고, 원수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여 이웃으로 만나는 창조적 사랑이 실천된다.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 자기를 헌신하는 것도 비범성이다.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에 교수로 일할 수도 있었는데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로 돌아가는 것도 비범성이다. 의의 길을 택한 그는 비범성에 따라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처형당했다. http://youtu.be/nEyqjJ5fGCA

"비범성은 참으로 경건한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절대적인 자발적인 행위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단순한 순종에 저항하는 인간의 자유의 승리였다."ㅡ본회퍼,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2013. 179면

"만약 제자가 비범성을 비범성으로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것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육신으로 열광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는 주님을 단순히 섬기면서 행동하기 때문에 비범성을 오직 당연한 순종의 행위로 여길 따름이다. 예수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는 참으로 세상의 빛을 비추는 등불일 따름이다. 빛을 비추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그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는 가운데서 주님을 따름으로써만 빛이 된다."ㅡ본회퍼, 윗책, 181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혹은 비범성을 위해 비범성을 실천해서는 안 된다. 제자의 선행은 어느 정도 보이기 마련이나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신이 행한 것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자신의 선행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나의 선행이 된다. 본회퍼는 자신을 잊은 사랑을 말한다. 이때 잊은 자신은 옛 사람이다.그래서 본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ㅡ "너희의 선행을 기억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의 선행만이 남는다."

자기가 의로운 일을 하고도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 지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범성이다. 머리가 똑똑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뭐 그런 거 아니다. 본회퍼에게 '비범성'은 희생할 줄 알고, 도와줄 줄 알고, 그러면서도 그렇게 했는지도 자신이 모르는 은밀한 지경이다.

그 비범성은 은밀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 나치와 결탁된 타락한 기독교는 은밀하게 하지 않았다. 드러내 놓고 히틀러와 악수하고 히틀러를 메시야로 찬양했다. 본회퍼는 산상설교를 풀어내면서 '은밀한 비범성'과 히틀러를 메시야로 찬양했던 썩은 목사들을 비교해낸다. 요즘 한국 개신교 상황도 본회퍼 시대 때 권력과 금권에 아부해서 스스로 권력과 금권이 되었던 독일의 주류 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본회퍼가 보는 '은밀한 비범성'의 본질은 팔복에 있다. 마태복음 5장 1~12절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은 가장 온유한 자, 슬퍼하는 자, 애통하는 자, 의에 굶주린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가 행동했던 그 모습대로 사는 자, 팔복으로 사는 자, 곧 슬퍼하는 자와 함께 하는 자야말로 '은밀한 비범성'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윤동주 시인의 「팔복」을 다시 만난다.

팔복(八福)
ㅡ마태복음 5장 3~12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이 시가 반(反)신앙시 혹은 풍자시라는 평론이나 논문들이 있다. 이러한 논문들은 윤동주가 썼던 "슬픈"이라는 단어조차도 검색해보지 않았던 논문들이다. 시(詩)는 시 스스로 증언한다. 시가 시를 말한다.윤동주를 제대로 읽지 못한 단견들이다. 윤동주야 말로 본회퍼가 말했던 '은밀한 비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슬픔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는 단순한 '비범성'의 원리를 깨달은 것이다. 「팔복」을 썼던 1940년 12월 같은 시기에 썼던 「병원」의 마지막 3연을 보면 공통점이 나타난다.

女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ㅡ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었던 자리에 누어 본다.
ㅡ윤동주「병원」3행

아픈 환자가 떠난 침대에 누워보는 마음, 그것은 슬픔과 함께 하는 마음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라며 슬픔과 동행하겠다는 다짐이다. 슬픔과 함께 하는 삶이 곧 행복이라는 전복적 사고, 아니 저 다짐의 고정점은 위의 시를 쓰고 6개월 뒤에 쓴 아래 구절이다.

행복한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더 쉽게 써볼까. 내가 자주 가는 7천원짜리 이발소 블루클럽에는 늘 한 분이 내 머리를 커트해준다. 그런데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 여인의 담당 자리에는 아프리카 소녀 사진이 석장 붙어 있다. 물어보니, 십여년간 매달 2만원씩 저 아프리카 소녀의 교육을 위해 보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왜 보내냐고 물으니까 답은 간단했다.
"행복하니까요. 그냥"

"그냥"이란다. "그냥" 이 말이 중요하다. "그냥"을 윤동주 식으로 번역하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이다. 슬픔과 함께 하는 자는 복이 있는 거다. "그냥"을 본회퍼 식으로 번역하면 은밀한 비범성이다. 비범성이 은밀해야 하는 이유는, 만약 제자가 비범성을 스스로 자랑으로 여긴다면, 이것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육신으로 열광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진짜 참 인간은 오직 당연히 의에 대한 순종의 행위로 비범성을 행동하기에 은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은밀한 비범성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적인 행위다. 비범성=은밀성=일상성이다. 세상 속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되다'가 아니다. 그냥 빛이고, 소금이다인 일상적인 '이다'이다.

만약 한 인간이 비범성 자체만을 바라보고 드러낸다면, 그는 이미 예수를 따르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한 선행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 비범성의 절정은 십자가에 고독하게 못 박힌 젊은 예수의 고난(passio)이 정점이다. 십자가야말로 삶의 비범성을 최고로 표현한 것이다. 윤동주 시 「십자가」는 은밀한 비범성의 시각에서 읽으면 공감을 넘어 체험이 된다.

윤동주와 본회퍼, 두 사람은 인류 역사에 진정한 비범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 기억해야 할 종요로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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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 홍만조 목사님의 <본회퍼 강의>를 듣고 와 이 글을 씁니다. 본회퍼의 삶에 그림자도 못 따라갈 서생이 본회퍼를 생각해 봅니다. 제가 해온 노숙인을 위한 '민들레 문학교실'에 참여해오신 한 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1년 이상 보아온 분이고 신뢰하는 분입니다. 습관적으로 구걸하는 분이 아닙니다. 저는 자활의지 없이 남에게 손만 벌리는 이는 절대 돈을 보내지 않습니다. 돈보다 정신적 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래 분은 다릅니다.

민들레 문학교실에 가면 미리 자료를 복사해두고 제 조교 역할을 하시던 분입니다. 작가가 되고 싶다며 저에게 늘 글을 보냈고 결국 노숙인 민들레 문학상을 받았고, 제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이번호 계간지에 산문을 발표하는 작가지망생입니다. 현재 성공회대학 노숙인을 위한 성프란치스코 인문학 교실에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저와 시청 광장에서 촛불도 함께 들던 존재입니다.

작년 말, 이 분이 월세 17만원짜리 임대주택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전화로 듣고, 제가 다시는 노숙인으로 돌아가지 말라며 통화하다가 기뻐서 울컥 했습니다. 숙대에서 남영동으로 내려오다가 혹시 학생들이 볼까봐 골목으로 들어가 울다 웃다 그랬었습니다. 이 존재가 다시는 거리에서 자지 않도록 이번 한번만 '은밀한 비범성'으로 조금만 입금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은밀성을 어기고 비범하지도 않기에 10만원을 넣었습니다. 10만원 아래로 여유가 되시는 분은 1만원이든 5천원이든 이 분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응원해주시면 합니다. 일어설 수 있는 분입니다. 은밀한 비범성을 포기한 저보다 많이 입금하지 마시고요. 제가 드릴 것은 없고 책으로 나올 '윤동주'에 관한 글들 출판사에서 싫어하겠지만 아래 붙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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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께 부탁드립니다

지금껏 고시원 생활하면서 자활근로와 막노동을 하면서 고시원비를 마련했고 생활해 왔습니다 저축을 해야하는데 고시원비와 생활비 교통비로 하다보니 저축할 금액이 없었습니다 올해초부터 임대주택을 얻어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자활근로는 월42만원밖에 되질 않아 월 임대료와 생활요금을 내질 못해 임대 주택 퇴거 조치 받게 되었습니다 직장도 없고 겨울내내 막노동을 하려고 인력소에 나갔지만 몇번 나가지 못해 임대료는 물론 생활비 교통비도 되질 않아 이렇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페북 선생님들께 간절하게 부탁하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는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백만원만 빌려 주시면 이번달 안으로 취직해서 늦어도 칠월까지 갚도록 하겠습니다 백만원으로 밀린 임대 주택 월 임대료 납부하고 생활요금(가스비 전기세 수도세) 납부하고 이번달 안으로 취직해서 4월 5월 6월 까지 일하여 월급 받아 모아서 칠월엔 원금과 이자를 쳐서 갚겠습니다 그리하여 열심히 일을해서 생활 안정되고 글쓰는데 집중해서 작가의 길을 가겠습니다 페북 선생님들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듬어 주셔서 취직할수 있게 도와주세요 지금도 취직할수 있고 오라는 곳도 많습니다 그런데 수중에 교통비도 생활비도 부족하여 취업을 망설이고 있습니다 취업을 해서 정상적으로 생활하여 글쓰는 데 더 집중할수 있게 도와주세요

집주소-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333길 25호 로얄 크리프 빌라 204호
핸드폰-010-2268-9429
집-070-8154-9429
국민은행 계좌번호 578601-01-248578(이지화)

입금해 주시고 저에게 문자나 연락을 해 주세요 그러면 칠월에 원금과 이자를 쳐서 갚겠습니다 그럼 함께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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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내일은 없다>(1934.12.24.) http://j.mp/1e1OIE1
윤동주와 명동마을 http://j.mp/15Rqu7e
숭실 숭실 합성숭실 http://j.mp/19rxNTX
11월의 시 「별 헤는 밤」「서시」「간」http://is.gd/uFQbAj
릿쿄대학 시절, 윤동주 유작시 5편 http://j.mp/18U6z8s
후쿠오카 형무소의 윤동주 http://j.mp/15R3QBW
파블로 네루다, 백석, 윤동주 http://j.mp/19Wr7n7
형(兄)이라는 표현 http://j.mp/17zKRfA
윤동주와 정병욱 ㅡ 한글을 지킨 두 청년 http://j.mp/17M90wl
윤동주 「팔복」과 본회퍼의 '은밀한 비범성' http://is.gd/nVMnfM

- 김응교(시인, 1962-), '윤동주 「팔복」과 본회퍼의 은밀한 비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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