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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아카이브49

최영미, '일상은 아무리 귀찮아도 버릴 수 없는 여행가방과 같은 것'(<시대의 우울> 중에서) 런던의 호텔에서 어느날 일찍 잠이 깬 나는 창문 너머 새벽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씰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의 말이 생각났다. 내 시들은 동이 트기 전, 우유 배달부가 오기 전, 거의 영원에 가까운 푸른 새벽에 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원에 가깝게 푸르던 하늘빛은 어느덧 사그라저 밋밋한 회색으로 변해갔다. 이제 우유 배달차가 지나가고 번잡스러운 일상이 시작되는 아침이 올 것이다. 이 여행이 끝나면 나 또한 저 시끌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그러나 지저분한 건 오히려 삶인지도 모른다. 삶은 때로 우리를 속일지라도 생활은 우리를 속이는 법이 거의 없다. 그것은 때맞춰 먹여주고 문지르고 닦아주기만 하면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일상은 위대하다. 삶이 하.. 2023. 5. 1.
23.04.03. 시선, 그 끝에 와 닿는 모든 것을 객체로 사로잡아버리는 강력한 힘 “내가 문제의 사람을 ‘인형-객체’로 취급할 경우, 나는 그에게 사물에게 적용하는 시공간적 범주들을 동일하게 적용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내가 문제의 사람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여길 경우 사정은 복잡해집니다. 우선 이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가 나의 세계 내에서 형성됩니다. 또한 나의 세계는 그가 중심인 극점極點을 향해 유출됩니다. 사르트르는 이 유출을 나의 세계에서 발생한 ‘내출혈hémorragie interne’로 규정합니다. 물론 내출혈이 계속되면 나는 점차 세계의 중심 위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의 세계에 인간이 출현하는 것은 나의 세계를 훔쳐가는 하나의 특수한 존재가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사르트르는 이런 의미에서 타자의 출현을 나의 세계 속에 생긴 ‘하나의 작은 균.. 2023. 4. 3.
문유석,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따스함'(<최소한의 선의> 중에서) 인류학자 김현경은 그의 아름다운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인간과 사람이라는 개념을 구분하면서 사람이란 구성원들의 환대를 통해 비로소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지만,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포스러운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나가는 순간에 집에 갇힌 이탈리아 사람들은 발코니에 나와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가격리중인 가족을 위해 담당 공무원은 햇반, 김, 참치 캔이 든 상자를 두고 가고, 이웃 부부는 맥주에 치킨을, 그 따님의 친구는 붕어빵과 계란빵을 종류별로 사서는 현관 문고리에 걸.. 2022. 5. 14.
김현경,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사람, 장소, 환대> 중에서)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김현경, (문학과지성사, 2015), 1장 사람의 개념 2022. 5. 14.
김소연, '나 자신은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장소이자, 나 이외의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장소'(<한 글자 사전> 중에서) 곁 ‘옆’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나’와 ‘옆’, 그 사이의 영역. 그러므로 나 자신은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장소이자, 나 이외의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장소. 동료와 나는 서로 옆을 내어주는 것에 가깝고, 친구와 나는 곁을 내어준다에 가깝다. 저 사람의 친구인지 아닌지를 가늠해보는 데 옆과 곁에 관한 거리감을 느껴보면 얼마간 보탬이 된다. 김소연, (마음산책, 2018). *** 일터가 서점 리스본&포르투 5분 거리에 있어요. 점심 먹고 동료들이랑 산책할 때면 꼭 한 번씩 지나게 돼요. 점심시간이 1시 10분까지라 조금 멀리서 오픈 준비 중인 모습만 자주 봤어요. (퇴근 후에 가끔 방문하기도 하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었어요.) 그렇게 2년 정도 지나니 내적 친밀감만 혼자 무성하게 키웠더라고요. 사실 .. 2022. 5. 14.
김지혜,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벼야 할 때'(<선량한 차별주의자> 중에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약함, 불행, 부족함, 서툶을 볼 때 즐거워한다고 했다. 웃음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조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을 우월성 이론superiority theory이라고 한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누군가를 비하하는 유머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대상보다 자신이 우월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중략) 사람들은 자신이 동일시하는 집단을 우월하게 느끼게 하는 농담, 달리 말하면 자신이 동일시하지 않는 집단을 깎아내리는 농담을 즐긴다. 만일 상대 집단에 감정이입이 일어나면 그 농담은 더이상 재미있지.. 2022. 5. 13.
무라카미 하루키, '영원한 여성성에 의한 구원과 은총'(<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너와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꼭 해야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 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너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 모든 것을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 하고 말했다. 미도리는 오래도록 수화기 저편에서 침묵을 지켰다. 마치 온 세상의 가느다란 빗줄기가 온 세상의 잔디밭 위에 내리는 듯한 그런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2021. 7. 11.
무라카미 하루키,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나는 몇 번 고개를 젓고 미도리 얼굴을 보았다. “내 머리가 나쁘기 때문일 테지만, 때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갈 때가 있어.”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 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그거 철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정말이야. 나는 경험적으로 배웠어.” 미도리는 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일본 소설가, 1949-), 《노르웨이의 숲, ノルウェイの森》(민음사, 2017). 2021. 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