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4일 월요일
부제: 오매 핸애 왔냐
월요일 16시 35분 센트럴시티에서 광주행 버스를 탔다. 늦은 귀향이라 그런지 도착하는 데 3시간 반도 안 걸렸다. 그런데 어째 오늘은 광주도 서울 못잖게 쌀쌀하다. 겨울철이면 보통 버스에서 하차하자마자 훈기가 진동을 하는데 오늘은 옷깃을 단단히 여며야 겠다. 광주는 내게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곳이다. 낮은 건물과 탁 트인 시야,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겨울에도 훈기 가득한 공기 그리고 엄마 손 집밥. 나는 오감으로 광주를 기억한다. 어쩜 광주는 택시만 타도 이렇게 정겨운지!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도, 택시 기사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도 참 맛깔난다. 노곤한 피로가 풀리고 숨통이 트인다.
마중나온 우리 엄만 그새 또 늙었다. 텅텅 빈 캐리어도 무겁다며 본인이 끌고 가신단다. 내가 우리 여사님 없으면 어떻게 사나. 집에서 엄마랑 단둘이 마주 앉아 동치미랑 삶은 꼬막 한 접시 놓고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광주에서 하룻밤 자고 올라가는데 오늘은 할아버지 댁으로 향할 예정이다. 할아버지는 한동안 거동이 불편하실 정도로 쇠약해지셔서 기저귀 신세를 지셔야 했다. 그래도 큰 며느리라고 우리 엄마가 제일 의지되셨나 보다. 몸져누우실 때면 입맛 없다고 죽 한 숟가락 입에 대지도 않고 고집부리시다가도 큰 며느리가 챙겨드리는 환자식은 드셨다. 덕분에 엄마는 한동안 할아버지 댁에 매일 같이 출근해 링거 주사하며 수발을 들어야 했다.
며칠 전 할아버지 생신 때 막내 작은 아빠의 발언이 발단이 되었다. 설 전 날 손주들 할아버지 댁에서 하룻밤 묵었으면 좋겠다고. 또 이럴 때 장손녀가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설 전 날 당일이 되어 손주 단톡방에 물으니 호주 사는 재영이만 답을 한다.ㅋㅋㅋ 손주방에서 총무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세 사람이 있는데 뭘 해도 매번 이 세 사람만 적극적이다. 이런 건 막내가 해야 하는데? 막내 뭐하니! 여하튼 민주랑 뒤늦게 연락이 닿아 손녀들만이라도 모여서 가자는 것으로 얘기가 되었다. 설거지 마치고 샤워하고 잠깐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9시다. 그맘때쯤 민주가 원주 데리고 픽업왔다. 할아버지 댁은 서구 화정동이었고 우리 집에서 자차로 30분 정도 걸렸다.
우리가 도착할 즈음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이미 주무시고 계셨다. 조용히 거실만 점등하고 현관 옆 작은 방에 짐을 풀었다. 주방 찬장을 한참 뒤져 난방 밸브를 열고 거실 카우치에 모여 앉았다. 그런데 이것들이 자기는 집에 가서 잘 거라며 아이스크림 먹고 두어 시간만 놀다가 일어나겠단다. 그때였다. 작은 방에서는 일제시대 창가로 추정되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아! 우리 할아버지다. 잠꼬대인지 밤잠 설치는 노인의 불면을 달래기 위한 노래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그 노랫가락 참 구슬프고 처연했다. 노인은 추억을 먹으며 산다더니 우리 할아버지도 깊은 회상에 잠겨 과거를 사신다.
덜커덩! 안방문이 열렸다. 잠귀 밝으신 우리 할머니가 굽은 허리로 우릴 맞으셨다.
"오매, 이게 누구냐! 아이고 우리 딸들!"
"할머니, 현애 왔어요."
"오매, 핸애 왔냐! 언제 왔냐? 서울서 이제 왔냐?"
"저녁에 도착했어요. 집에서 저녁 먹고 오는 길이에요."
"아이고, 일어나 보시요! 핸애 왔소!"
"뭐! 핸애?"
"할아버지, 현애 왔어요. 핸애! 아직 안 주무셨어요? 저흰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다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
"핸애 왔냐? 이리 와 봐라. 다 이리 와 봐!"
손주들만 오면 초점 잃은 우리 할아버지 눈에 생기가 돌고 총기가 돈다. 할아버지라는 역할과 지위는 여든이 넘은 노인도 언제든 위엄있는 할아버지로 분하게 한다.
할아버지는 우릴 작은 방으로 불러 모으셨다. 첨언하자면 어딜 가든 작은 방은 늘 할아버지 몫이다. 두 분은 오래 전부터 각방을 써오셨다. 사연인 즉슨, 우리 할머니 잘 씻지도 않아 냄새나는 영감하고는 같은 방 쓰기 싫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명절 때면 안방에 이부자리를 펴고 손주들을 불러 모아 주무시는 게 낙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뻐하는 손주들도 발을 씻지 않은 놈들은 이부자리에 들이질 않으셨다.
"세수랑 양치 했냐? 발도 씻었고?"
청결을 중시하는 우리 할머니 세수는 했는지, 양치는 했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발은 씻었는지 한 사람 한 사람 구두로 점검하셨더랬다.
"발은 씻어야제-"
그런데 이놈의 영감이 냄새나 죽겠는데 잘 씻지도 않고 더럽다며 할아버질 작은 방으로 쫓아 내셨다.ㅋㅋㅋ 이렇게 해서 작은 방은 으레 할아버지 차지가 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ㅋㅋㅋ
"아그들이 맹절이라고 이렇게 다들 왔다요. 얼마나 보기 좋소. 느그들이 옹께 집이 북적-북적하니 좋다!"
그 다음 우리 할머니 레퍼토리,
"보시요. 손주딸들 모도 다 얼-마나 이쁘요? 모도 다들 아무쪼록 좋-은 사람 만나서 (후략)"
우리 할머니 이렇게 손주딸들 모다 놓고 볼 때마다 이런 인물들이 없다며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라고 노래를 부르신다.ㅋㅋㅋ
우리 할머니 고슴도치 할머니과는 아니다. 할머니가 객관적으로 봐도 손주딸들이 한 미모하는 것이다.ㅋㅋㅋ
그 와중에 우리 할아버지,
"내가 젊었을 때 사람들이 나보고 다 잘생겼다고 그랬어. 인물이 좋-타고!"
우리 친가가 할아버지, 할머니 닮아서 인물이 좋지~ 암 그렇고 말고!ㅋㅋㅋ 울 할머니, 할아버지 엄빠미소 지으며 흐뭇하게 손주들 바라보시며 일장연설을 시작하시는데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ㅋㅋㅋ 눈치 빠른 민주 녀석 현주도 곧 올 거라며 자기랑 원주는 현애 언니랑 거실서 잠깐 놀다 가겠다고 잽싸게 말을 끊었다.
그랬더니 우리 할머니 거실로 따라 나오셔선 떡이며 과일이며 쉴 새없이 나르신다.ㅋㅋㅋ 나더러는 할아버지가 너 애기 때부터 한 손에 올려 우쭈쭈하며 키운 거 아냐신다.ㅋㅋㅋ 내가 어떻게 그걸 잊겠어요! 우리 할아버지 전매특허! 말 그대로 내 양발을 한 손에 올려 놓고 들었다 내렸다 하셨더랬다. 내 유년기는 온통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하다. 할아버지 얼굴만 떠올려도 눈물이 또르르 흐를 정도로 할아버지를 끔찍히 사랑했더랬다. 나는 아버지 사랑을 할아버지를 통해 배웠다. 우리 할아버지도 찾아뵐 때마다 내가 너 한 손에 올려놓고 키웠다고 핸애가 벌써 이렇게 컸다고. 할아버지 조금만 더 저희 곁에 계셔 주세요. 나는 아직도 할아버지 없이 못사는 할아버지 껌딱지예요.
자연스럽게 화제는 핸주로 넘어갔는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지금이 몇 시냐며 이 늦은 시간에 핸주 혼자 온다고 전화해 봐야겠다며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하신다. 현주는 술자리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라 정확한 도착시간을 확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 현주는 지금 어디서 출발하는지, 몇 번 버스를 타고 오는지, 언제쯤 도착하는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시는데 머리 팽팽 돌아가는 손주딸 셋이서도 감당이 안되더라는.ㅋㅋㅋ (민주 표현에 따르면) 우리 할머니 너무 '똑똑'하셔서 그 연세에도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는 버스 번호며 노선을 다 꿰고 계실 뿐만 아니라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도보로 몇 분 걸리는지도 정확하게 계산하신다.ㅋㅋㅋ 그때부터 우리 할머니 안방으로 들어가 휴대폰 가지고 나오셔서 몇 번씩 현주한테 전화를 하시는데 내가 정말 우리 할머니한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민주 녀석이 현주가 저녁을 못 먹어서 근처 어디 들러서 요기하고 온다고 둘러대긴 했는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ㅋㅋㅋ 민주는 현주 데려다 주고 원주랑 집에 가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ㅋㅋㅋ 아놔 진짜!ㅋㅋㅋ 홀로 남은 나는 뒷수습을 위해 할머니를 모시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화장실 들렀다 불 꺼진 거실을 보고는 다 집에 갔냐며 안방 문을 열고 손주들을 찾으셨다.
"다 갔어? 가브렀어?"
"할아버지, 저 있어요! 애들은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온대요-"
"다 갔어! 가브렀어! 서운하다- 서운해!"
우리 할아버지 생전 자기 감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적이 없는데 서운하다시는 그 말씀이 가슴에 콕콕 박힌다. 내 가심이 왤케 찌릿찌릿허냐.ㅜ
그것도 잠시. 우리 할머니 내가 애상에 잠길 틈을 안 주신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와- 우리 할머니, 소등을 했는데도 5분에 한 번씩 일어나서 현주한테 전화를 거시는데 정말 이런 모습 처음이라는! 우리 아버지 학창시절 친구 집에 놀러간 아들 집에 질질 끌고와 공부시켰다던 전설처럼 내려오는 옛날 얘기가 일말의 의심없이 믿어졌다. 현주랑 계속 연락하고 있으니 걱정말고 주무시래도 새벽 1시가 넘도록 5분에 한 번씩 벌떡벌떡!ㅋㅋㅋ 요기를 해도 진즉에 했을텐데 아적까지 안 온다고! 심지어 원주 들어갔는지 먼저 확인해봐야겠다며 그 새벽에 작은 고모한테 전화하셨다.ㅋㅋㅋ 덕분에 오랜만에 작은 고모랑 통화했네. 그 와중에 현주 컬러링이 신의 한 수였다. 할머니 현주 컬러링으로 팝송이 흘러 나오자 핸주 이것이 전화를 안 받을라고 미국말 나오게 해 놨다고 이거 들어보라며.ㅋㅋㅋ 나는 또 현주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그런 거라고 둘러댔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정 개드립이었다. 새벽 2시 정도 되었나?ㅋㅋㅋ 현주 집에 도착한 후에야 우리 할머니 발 뻗고 주무셨다.
2019년 2월 5일 화요일
부제: 완벽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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