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죽음'이 '존재의 죽음'은 아닐 때>
1. 한 정치인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이곳 텍사스의 새벽이었다. 그 죽음이 일어난 곳과의 지리적 거리에 상관없이, 그 사람과의 개인적 친분 여부에 상관없이, 그의 죽음은 이토록 많은 이들에게 아픔과 상실을 가져오고 있다. 생생한 목소리를 지니고 살아있던 사람이 더는 그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의 존재의 의미를 그가 육체적으로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보게되는 것이다. 사회정치적 존재감을 그토록 깊숙하게 주어왔던 한 사람의 죽음은 그의 삶의 자취를 되돌아보게 하고, 동시에 도대체 육체적으로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돌연히 마주하게 한다.
2.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에른스트 블로흐는 자신의 <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 (The Principle of Hope)>의 서론을 이 질문들로 시작한다. 이런 물음들을 마주할 때, 대부분의 사람이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불안과 두려움. 그 누구도 명증성을 가지고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기에 불안감을 주며, 이 질문들은 인간의 지독한 한계성을 인식하게 하기에 두려움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들은 살아있는 인간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찾아온다.
3. 이러한 질문을 마주하는 것은 치열한 자기만의 시공간을 요구한다. 자신의 살아있음의 의미는 스스로 창출해 가야 하는 것임을 자각하게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종교로 도피함으로써, 어떤 이들은 사유하지 않음의 삶으로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도피한다. 이 질문들을 마주함에서 요청되는 것은 고독의 시공간이다. 그러나 현대의 삶은 고독의 시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스스로 또는 외적 환경들이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도피하게 만든다. 이 물음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세계에 대한 희망을 배우게 하고, 그 희망함의 의미를 일상세계 속에서 뿌리내리고자 하는 실천의 공간으로 인도한다.
4. 한 정치인의 돌연한 죽음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존재적 죽음으로까지 이어지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가 꿈꾸던 평등과 정의의 세계를 향한 희망을 배우는 것이다. 그의 육체적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지녀왔던 희망까지 묻어버리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육체의 죽음과 존재의 죽음은 다르다. 그의 육체적 죽음이 존재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은, 우리 각자의 어깨에 그가 이루려고 했던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희망의 한 자락을 짊어지고 하루하루 걸어가는 것이다.
5.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은 우리 각자의 삶의 여정에서 육체의 죽음을 마주하기까지 씨름해야 할 것이다.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해 치열하게 씨름하다가 간 한 정치인의 육체의 죽음이 우리에게 탄식과 원망만이 아니라, '존재의 죽음'에 대한 저항,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배우고자 하는 의지로 이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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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편집자의 요청에 의하여 <뉴스엔조이> 에 실렸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8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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