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잊을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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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특급야간열차 https://bit.ly/2MHmHq5
독한 습관, 황현산 https://bit.ly/2B30nFJ
보들레르 낭독의 밤, 황현산 https://bit.ly/2w8cI67
황현산 노회찬 대화 https://bit.ly/2P2Su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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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갔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노회찬 의원 장례식 때도 그랬는데 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삼촌 장례식 때 장난감 갖고 노는 아이가 이럴까. 그와 친밀한 기회를 갖지 못한 나는 사이다 한 캔 마시며 그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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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지내고 귀국했을 때 문단은 낯설었다. 문단 주류인 적도 없었던 내가 없는 십여 년 동안 많은 이들이 등단했고 사라졌다. 문학동네 필자 모임에 갔을 때, 내 옆에 앉았던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는 그녀는 내가 못 알아보니 매우 섭섭해 하는 표정이었다. 젊은 작가들이 건너 편 좌석에서 " 저 사람 누구야?"라고 작게 묻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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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책이나 식민지 시대 작품만을 읽던 나는 최근 작품을 잘 몰랐다. 적응하려고 다시 최근 작품을 읽으면서 눈에 띈 평론가는 단연 그였다. 그의 문장은 꾸밈없이 수수했다. 내가 알 수 없는 문장을 아름답게 풀어줬다. 복잡한 미학에 매몰될 수 있는 미학주의자일까 싶었는데 실은 역사를 직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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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에서 서성이다보니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으나, 그의 책은 거의 모두 샀고 읽어왔다. 2015년 무렵 KBS <TV 책을 보다> 기획위원을 할 때, 회의에서 가끔 그를 모시자는 얘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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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방송인 <tv책>에서 <어린왕자, 랭보 그리고 황현산>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이 결정되고, 한 마디 해야 하는 역할이 내게 주어졌다. 먼저 선생님께 알려드리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여, 트위터로 여차여차 하여 선생님을 소개해야 하는 입장이라며 쪽지를 보냈다. 곧 돌아온 답신에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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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글로만 알고 있던 분과 이런 방법으로라도 인사를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기회가 되면 오프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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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도의 거물이라면 답신을 안 하거나, 고맙습니다, 한 줄만 답신해도 감사할텐데, 그가 보낸 세 문장의 행간에는 악수하듯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게다가 까마득한 후학에게 그는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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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은 미학주의자면서도 현실의 아픔도 놓치지 않는 비평가다."
KBS TV 책을 보다에 나오셨을 때 내가 방송 중에 했던 멘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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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작년 <대산문화재단 탄생 100주년 행사>에서 뵐 수 있었다. 그는 발표했고 나도 발표인가 토론인가를 했다. 행사가 끝나고 그와 대화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쓴 신동엽, 김수영, 윤동주에 대한 글을 읽었다고 하셨다. 졸저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를 좋게 봐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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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윤동주가 폴 발레리 책을 세 권 읽었어요. 프랑시스 잠 등 프랑스 문학을 좋았했었어요."
질문 같은 말에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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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절 윤동주가 그만치 발레리 책을 읽었다는데, 현재 국내에 폴 발레리 전공자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송욱 선생이 조금 연구하신 정도죠. 오래된 책이지만 송욱 선생이 남긴 시학평전을 읽으시면 조금 정보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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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평전(詩學評傳)』은 1963년에 나왔으니 오래된 책이라 할만한데, 그 기록을 뛰어넘을만한 프랑스 문학계의 연구가 아직 없다는 말일까. 느릿느릿 말하는 모습이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과 비슷했다. 며칠 후 우편으로 그의 메모가 있는 글을 받았는데, 머리칼이 곧두 설만치 놀랄만한 메모가 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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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40년만큼
신동엽을 뛰어넘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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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내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하는 듯한 메모였다.
내년이 신동엽 50주기인데, 그것을 넘어 40년만큼 뛰어넘으라는 숙제였다. 연구하면서 연구대상에 함몰되어 우상을 삼거나 따라가지 말고, 스스로 뛰어넘으라는 말씀이었다. 저 글씨를 책상 오른쪽에 붙여 놓고, 1년쯤 지났을 때, 그의 부음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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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떠나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영정 앞에서 시인 정우영 형은 사람이 드문 시간에 펑펑 울었다고 문화예술위 사람들이 그러던데, 옆집 장례식 보듯 멍하기만 하다. 왜 저리 많은 이들이 배웅하며 애통해 하며 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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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채나는 군자여! (有斐君子,유비군자)
끝까지 잊을 수가 없다고 한 것은 (終不可諠兮者,종불가훤혜자)
그 무성한 덕과 지극히 착한 것을(道盛德至善, 도성덕지선)
백성들이 잊을 수 없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民之不能忘也, 민지불능망야)니라." - 『대학』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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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존경받을 리더의 자질을 말한 부분이다.얼마 전 먼 길을 떠난 황현산 노회찬이란 두 존재는 "빛나는 군자"였다. 황현산은 문단의 리더였고, 노회찬은 정계의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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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애도하며 두 분을 "끝까지 잊을 수가 없다" 하는 까닭은, 두 분이 보여준 "무성한 덕과 지극히 착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을 몸에 지닌 이를 죽어서도 사람들은 존경한다. 나에게 보내주신 저 짧은 몇몇 문장에도 그 분의 덕과 선이 묻어 있다. 황현산과 노회찬 두 분은 악에는 분노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낮고 착한 마음으로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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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선생이 미당 문학상 심사위원을 제일 많이 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황 선생님 말로는 자기도 그만치 많이 심사했다는 사실을 뒤에 알았다고 한다. 누구나 흠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의 무성한 덕과 지극히 선함이 그의 흠을 덮어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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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단순히 덕과 선이 있다고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회찬과 황현산은 자기 분야에서 최대의 노력을 했던 인물이다. 위의 『대학』 3장 인용문 바로 위에 아래 문장이 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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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는 듯 미는 듯 하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고,
(如切如磋者 道學也, 여절여차자 도학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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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는 듯 가는 듯 하다는 것은 자기를 닦는 것이며,
(如琢如磨者 自修也, 여탁여마자 자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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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하여 빈틈없고 굳세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모습이고,
(瑟兮僩兮者 恂慄也, 슬혜한혜자 순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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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드러난다는 것은 위엄 있는 거동이다.
(赫兮喧兮者 威儀也, 혁혜훤혜자 위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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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덕과 선을 지닌 것만으로 잊혀지지는 않는다. 두 분은 플라스틱처럼 한 번에 찍어 만든 존재가 아니다. 유학 가지 않고 국내에서 다이나믹 현실을 체험한 황 선생이나 법대를 졸업하고 노동자로 지내고 정치인이 된 노회찬은, 자르고 밀듯 공부했고[切磋道學], 쪼고 갈듯 수양했다[琢磨自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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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나 뿔이나 상아나 옥돌로 물건으로 만들려면 자르고[切, 절], 대패로 밀거나[磋, 차], 망치로 쪼아내거나[琢, 탁], 모래나 돌로 갈아야[磨, 마] 한다. 큰 그릇을 만들려면, 스스로 자신을 자르고 밀고 쪼고 갈아야 한다 [切磋琢磨 大器晩成, 절차탁마 대기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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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이나 황현산 두 분이, 자르고 밀듯 학문(切磋, 절차)에 몰두하고, 쪼고 갈듯 수양(琢磨, 탁마)하며 살아온 삶을 사람들은 기억하는 것이다. 저들의 공부와 수양을 신뢰하고 알고 있기에 이토록 아깝게 애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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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로 덕을 환하게 밝혀 굳세게 보일 때도 두 분은 조심하고 두려워 하는 순율(恂慄)의 모습을 보였다. 존경받는 삶을 살았지만, 위엄 있는 위의(威儀)로 권력에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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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인격자이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늘 부족하다며 조심스럽고 또 의젓하고 기품있게 행동했던 분들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장례식에서 돌아와 그의 책을 책상 옆에 모아 놓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책장 한 칸을 차지했다. 신동엽을 뛰어넘을 숙제를 그는 내게 주고 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의 글을 밑줄 치고 읽으며, 낮고 느린 말씀이 나오는 영상이라도 보고 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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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응교(시인, 1962-), '그들을 잊을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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