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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일지

젊은 노교수, 청년 박건택

by 아나빔 2016. 11. 23.

지난 월요일 저녁.
다섯 시간의 장거리 운전 후 기숙사에 도착해서
부르르 떨릴 만큼 기력이 다한 몸을 변기 위에 앉혀놓고
내려놓음을 준비하며 멍 때리고 있는데

2학년 3반의 임원진으로 추정되는
정현애 전도사님으로부터
글씨를 의뢰하고자 하는 까톡이 와있었다.

"아...글씨 쓸 시간 없는데..
과제가 겁나게 많은데..예약된 글씨들도 있는데..
축구도 해야 하는데..갖고 있는 액자도 없는데..
사러 나가야 하는데.. 추운데..기름값 드는데.."

그런 생각들로
여전히 변기 위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는 순간
또 다른 임원으로 추정되는
황봉규전도사에게 전화가 왔다.

기력이 다해 정신이 없었는지
내려놓음의 공간에서 피어나는
암모니아 냄새에 취했는지

어버버버 하다가..
하루 만에 글씨를 써야 하는 의뢰를
수락하고야 말았다.

이걸 어떻게 하나..
내려놓음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다시 연락이 왔고
"청년 박건택"이라는 문구를 써달하고 한다.

교수님과는 개인적으로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지만
한 학기 동안의 수업을 들었었고
교수님께서 집필하신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인상 깊게 읽었었다.

괴짜 같은 모습이 있으셔서
학생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적어도 내 주변의 사람들은 교수님을 좋아했고
'천재성이 있는 괴짜 교수님'으로 통했다.

어떡 척_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고
때로는 거침없는 발언들이 시원하기도 했고
깔뱅을 가르치시면서도 깔뱅을 까기도 하며
가르쳐 주시는 것들이 좋았고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시거나
때로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으로 대표되는
외형적인 특이함에서 풍겨지는 느낌도 좋았고

다 헤아리기는 어려웠지만
교수님의 지식과
세월의 경험에서 나오는,
학생으로 하여금 여러 생각들을 갖게 하는
말씀을 듣는 것이 좋았다.

교수님의 은퇴 논총에
'젊은 노교수'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것에 동의할 수 있었기에
'청년 박건택'이라는 글씨를 써내는 데 있어서
심적으로 전혀 어려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수님에게 전달되는 글씨를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
글씨를 쓰면서 더욱 감사하게 여겨졌다.

교수님은 은퇴. 나는 졸업.
그리고 새로운 시작.
__________________
화목하게 하는 글.씨
https://m.facebook.com/ofy5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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