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삐까삐까 별의 또또", 생애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책 제목이다. 학교 숙제로 친구랑 둘이서 무등도서관 어린이실에 갔더랬다. 집에 어린이용 도서가 거의 없던 터라 당시 도서관 어린이실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 당시로 말할 것 같으면 국민학교가 이제 막 초등학교로 개명을 했고, 각 학교마다 급식실이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아직까지는 학급문고가 학교도서관의 역할을 대신하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그렇게 다양한 주제의 책을, 그렇게 다양한 장르로, 그렇게 많이, 그것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은 10살 짜리 소녀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제일 먼저 집어든 책은 위인전이었다. 백범 김구, 우장춘, 이순신, 헬렌켈러, 아브라함 링컨, 넬슨 만델라, 장영실, 나이팅게일 등등. 욕심은 많아가지고 책상에 여러 권을 쌓아두고 눈 깜박이는 시간 아껴가며 줄기차게 읽어댔다. 폐관시간 전에 최대한 많은 책을 읽고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잔뜩 상기된 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그러다 폐관시간을 30여분 남겨두고 집어든 책이 한 권 있었는데 그 책 제목이 바로 "삐까삐까 별의 또또"였다. 마감임박이라는 네 글자가 사람을 흥분시키는 마력을 지닌 것처럼 나는 폐관임박이라는 단어에 이성을 잃고 발을 동동 구르며 사력을 다해 읽어댔다. 첫 장을 넘기면 반드시 마지막 장을 넘겨야 한다(지금 돌아보면 아버지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것 중에 가장 요긴하면서도 가장 피곤한 기술이다).
무슨 영화를 누려보겠다고 그렇게 시간을 초단위로 쪼개가며 전투적으로 읽어댔는지 모르겠지만 폐관을 알리는 도서관 사서의 목소리에 끝끝내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장탄식과 함께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은 내게는 내일이 있다는 것과 부모님 주민등록번호와 동의서가 있으면 어린이도서관 열람증을 발급받아 도서대출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벌써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나라는 사람은 마치 애초에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자신에게 내린 내적 명령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사람이다. "~해야한다" 혹은 "~해서는 안 된다"라는 당위에 목숨을 거는 수고스러움 내지는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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