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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편린

방관과 동조로서의 침묵에 대하여

by 아나빔 2017. 7. 11.

제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 없지만... 내 경우에는 타인이나 공동체에 별로 관심이 없는 신학생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일반화에 불과하겠지만... 나라는 사람의 한계는 늘 이 지점과 맞물려 있다. 합동 교단에 10년 간 몸 담으며 나는 이 공동체에서 지나치게 의협심이 강한 오지라퍼를 맡고 있다. 피곤하게 사는 사람인 동시에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럴 때마다 나 역시 고구마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가끔은 제도에 편승한 직업인으로서의 종교인이 되려고 신대원에 다니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분명 내가 이해하는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자기 학점, 자기 사역, 자기 가정, 자기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전 우주적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타인에 대한 무관심,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무관심이 자꾸 몸에 베는 것 같아 불쾌하다.

어떤 사람은 신대원에서는 자기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며 꽤 진지하게 애정을 담아 자기 주장이나 자기 생각은 마음 속에만 담아두는 게 지혜라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나는 타인이 원하는 모범 답안의 화신처럼 살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지만. 더더구나 나는 표현의 자유는 그것이 타인과 공동체를 위할 경우 적극 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온도 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이 겪는 불의와 공동체적 차원의 불의에 대해서 만큼은 부당함을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은 금이다'라는 명언은 전후맥락에 따라 '침묵은 독이다'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실천적 지혜는 궁극적으로 어떤 문제 앞에서 사회공동체의 미덕을 위해 발휘될 때 효용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개인의 이기적인 욕구와 체면을 위한 얄팍한 지혜는 가라.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계급, 직업, 경제 구조에서의 뿌리뽑힘이 아닌 뿌리내림을 지향하는 신학이라면 그 모든 과정이 도대체 무슨 의미나 가치가 있을까? 오히려 노동을 통해 정직하게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평범한 노동자가 더 거룩하지 않을까? 엘륄은 인간 삶의 정상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과의 단절로서의 뿌리뽑힘이 그리스도께서 선사하신 참된 자유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외국인임과 나그네임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불이익을 감수하라고 그 누구도 감히 강요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노예화된 삶에 길들여져 있다면 적어도 비겁한 자기 변명에 숨지는 말자. 신앙적인 색채를 제거하면 자기부인이라는 것도 자기기만에 대한 극도의 경멸이 아니겠는가?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참된 인간됨은 자기기만과의 치열한 사투와 부끄러움을 아는 지치에 있었다. 사실을 왜곡시켜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외부로 책임을 전가하는 습관적 사고는 가급적 지양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무것도 붙들 수 없으며 무엇에도 우리를 고정시킬 수 없다. 즉 평화롭고 안전하며 안락한 삶에서 노예로 남아 있느냐, 아니면 광야에서 자유롭게 되느냐의 선택이다. 광야 외에 어떤 장소도 자유에 적합한 곳은 없다. 모든 보장, 모든 보호, 모든 질서가 사라진 곳 외에 자유에 적합한 다른 장소란 없다. 자유는 우리를 광야로 밀어 넣는데 우리는 거기서 살고 정비하며 그곳을 인간답게 만들고 우리의 존재로 채워야한다. 우리의 조국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환상을 쫓은 뒤 우리에게 살도록 주어진 유일한 실제적 현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 것 뿐이다. 인간이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인식할 때 인간이 자기 만족을 위해 창조의 자원을 개발하는 일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이 불확실한 것들을 향해 신앙으로 전진할 때, 그때 하나님은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림을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정황과 관련된 뿌리뽑힘은 삶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반드시 뿌리뽑힘을 낳는다."

새벽 1시에 일어나 라면을 끓여먹고 혼자 두서없이 열변을 토하는 나는 아직 시차적응이 덜 된 닝겐이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