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메모장을 열어보니 '너'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언제 적은 글자인지는 기억이 없다. '너' 아랫줄에 너는 이인칭인가 삼인칭인가, 라는 낙서도 적혀 있다. '정맥'이라는 글자도 적혀 있다. '너'와 '정맥'을 합쳐서 '너의 정맥'이라고 쓸 때, 온몸의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이라는 글자 밑에는 이름과 부름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라고도 적혀 있다. 치타, 백곰, 얼룩말, 부엉이같이 말을 걸 수 없는 동물의 이름도 들어 있다. 이 안쓰러운 단어 몇 개를 징검다리로 늘어놓고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건너가려 했던 모양인데, 나는 무참해서 메모장을 덮는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제3부 몸-바다의 기별 중에서, p.225.
'북 아카이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영복,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강의> 중에서) (0) | 2016.01.21 |
---|---|
신영복,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강의> 수록) (0) | 2016.01.19 |
김훈, '다가오고 있는 인기척'(<라면을 끓이며> 중에서) (0) | 2016.01.12 |
도종환, 《희망의 바깥은 없다》 (0) | 2015.10.06 |
Aesop's Fable (0) | 2015.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