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만남은 은혜로 이루어진다. 찾아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향해 저 근원어를 말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기울인 행위요, 나의 본질 행위다.
‘너’는 나와 만난다. 그러나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에 들어서는 것은 나다. 그러므로 관계란 택함을 받는 것인 동시에 택하는 것이며, 피동인 동시에 능동이다. 그것은 마치 온 존재를 기울인 능동적 행위에 있어서는 모든 부분적인 행위가 정지되고, 그리하여 모든─한갓 부분적인 행위의 한계에 근거를 둔─행위감각(行爲感覺)이 정지되기 때문에 그 행위의 능동성이 수동과 비슷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근원어 ‘나-너’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에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 마틴 부버(유태인 철학자, 1878-1965), 《나와 너 Ich und Du》, p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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