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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을 공격했다'(<나를 따르라> 중에서)

by 아나빔 2021. 2. 17.

루터는 수도사였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한 복종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했다. 그는 세상을 버리고 기독교도의 일을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복종을 배웠다.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수도사가 되라는 부름을 받자마자 자기의 인생 전부를 걸었다. 하지만 루터와 그의 길은 하나님 자신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 그에게 다음의 사실을 알려 주셨다. 이를테면 예수를 따르는 것은 몇몇 사람의 칭찬할 만한 특별한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리신 명령이라는 것이다. 수도원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겸손한 행위가 성인들의 칭찬할 만한 행위로 변질하였고, 따르는 자의 자기부정은 경건한 자들의 최종적이고 영적인 자기주장으로 둔갑했다. 그 때문에 세상이 수도사의 생활 한가운데로 들어와,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다시 활동하고 있었다. 루터는 수도사의 세상 도피가 가장 정교한 세상 사랑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경건한 삶의 마지막 가능성이 물거품이 되자 은혜를 붙잡았다. 붕괴한 수도사 세계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리 최선의 삶을 살아도 우리의 행위는 헛되다"고 여기며 그 손을 붙잡았다. 그것은 그에게 선사된 값비싼 은혜였다. 그 은혜가 그의 전 존재를 압도했고, 그는 또 한 번 자기의 그물을 버리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되,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경건한 자아만은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자아마저 버렸다. 그는 자기의 공로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갔다. "너는 죄를 지었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용서를 받았으니, 네가 있는 곳에 계속 머무르면서, 용서받은 것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이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루터는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는 세상 자체가 선하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수도원도 세상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나서 보인 루터의 행보는, 초기 기독교 이래로 세상에 가해진 공격 중에서 가장 맹렬한 공격이었다. 수도사가 세상에 건넨 절교 선언은, 세상이 자기에게로 돌아온 사람을 통해 들은 절교 선언에 비하면 아이들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공격은 전면전이 되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이제는 세상 한복판에서 삶으로 실행되어야 했다. 수도원 생활의 특수 환경과 여러 편익 속에서 특별 행위로 실행되던 것이, 이제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자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되었다. 예수의 명령에 대한 전적인 복종은 일상의 직업 활동 속에서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세상 사람들의 생활 사이에서 충돌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심화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을 공격했다. 그것은 근접전이었다.

'루터는 순수한 은혜의 복음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서 예수의 명령에 대한 복종 의무 면제를 선언했다'거나, '종교개혁자가 발견한 것은 용서하는 은혜를 통한 세상의 거룩함 선언, 세상의 칭의였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루터의 업적을 치명적으로 오해하는 것도 없지 싶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세속 직업은 세상에 대한 맹렬한 저항을 표명함으로써만 그 정당성을 얻고, 예수를 따르는 가운데 수행되는 직업 활동만 이 복음으로부터 새로운 권리를 얻는다고 여겼다. 루터가 수도원을 뒤로하고 세상으로 귀환한 것은 죄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터가 선물로 받은 것은 값비싼 은혜였다. 그 은혜는 메마른 땅 위에 흐르는 물, 불안을 해소하는 위로, 스스로 택한 종살이로부터 해방됨, 모든 죄의 용서였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값비쌌던 까닭은, 그것이 행위를 면제해 주기는커녕,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끝없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 은혜는 값비싸서 은혜였고, 은혜여서 값비쌌다. 이것이 종교개혁자가 찾아낸 복음의 비밀이었고, 죄인의 칭의가 간직한 비밀이었다.

- 디트리히 본회퍼(독일 고백교회 목사 및 신학자, 1906-1945), 《나를 따르라, Nachfolge》, 값비싼 은혜, 3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