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너와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꼭 해야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 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너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 모든 것을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 하고 말했다.
미도리는 오래도록 수화기 저편에서 침묵을 지켰다. 마치 온 세상의 가느다란 빗줄기가 온 세상의 잔디밭 위에 내리는 듯한 그런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무라카미 하루키(일본 소설가, 1949-), 《노르웨이의 숲, ノルウェイの森》(민음사, 2017).
***
K는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법학도였다. 대학 락 밴드의 보컬이었던 그는 마이너 감성이 짙은 다소 퇴폐적인 사상의 소유자였는데, 연극이나 문학에 대한 주제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감수성을 발산하곤 했다. 순수와 퇴폐라는 이질적인 두 세계가 한 사람 안에 공존했다. 그게 그만의 묘한 매력이기도 했다.
그는 애장하는 책을 종종 빌려주기도 했는데, 특히 손때 묻은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오색 볼펜으로 한치의 망설임 없이 과감하게 그어댄 공감의 밑줄도. 그는 나도 이 작품에 매료될 거라 확신했겠지만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불안의 얼굴을 한 젊음이 허세와 치기 어린 미완의 모습으로 와타나베에게서, 나오코에게서, 미도리에게서 불쑥 튀어나올 때면 자화상을 보는 것 같은 불쾌함을 느꼈다, 뚜렷한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열외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함께.
십 년이 훌쩍 지나 다시 하루키를 읽는다. 꼭 치열했던 청춘의 회고록을 들춰보는 기분이다. 이따금씩 밀려오는 부끄러움이 유발한 화끈거림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긍정적으로 해석해보면 정서적으로 함몰되지 않고 관조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불안의 한복판에서 미도리를 찾는 숱한 와타나베들을 이제는 진심으로 따뜻하게 응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해피 엔딩이 아니라도 괜찮다. 그것이 새드 엔딩의 반의어가 아님을 알기에. 상실과 단절 끝에 남은 잔잔한 희망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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