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약함, 불행, 부족함, 서툶을 볼 때 즐거워한다고 했다. 웃음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조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을 우월성 이론superiority theory이라고 한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누군가를 비하하는 유머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대상보다 자신이 우월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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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이 동일시하는 집단을 우월하게 느끼게 하는 농담, 달리 말하면 자신이 동일시하지 않는 집단을 깎아내리는 농담을 즐긴다. 만일 상대 집단에 감정이입이 일어나면 그 농담은 더이상 재미있지 않다. 상대를 나와 관계없는 사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겨야 농담을 즐길 수 있다. 상대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가? 자신과 결코 동일시하지 않는, 거리를 두고자 하는 집단에 대한 비하는 내가 속한 집단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즐거운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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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포드Thomas Ford와 동료들은 비하성 유머가 마음속 편견을 봉인해제시킨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어떤 집단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보통의 상황에서는 사회규범 때문에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 비하성 유머를 던질 때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결과 규범이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편견을 쉽게 드러내면서 차별을 용인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설명을 편견규범이론prejudiced norm theory이라 부른다.
유머가 금기된 영역의 빗장을 순간적으로 풀어내는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일탈적인 행위가 유머를 통해 놀이 또는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된다. 가벼운 대화일 뿐이므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부적절하게 여겨진다. 이렇게 금기된 영역을 넘나들기 때문에 권력에 도전하는 풍자가 가능하고, 사회는 그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금기의 빗장이 약자를 향해 풀렸을 때 잔혹한 놀이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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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놀이’의 잔혹성은 특히 그 표현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간극 사이에 존재한다. 수신자의 입장에서 “그건 비하예요!”라고 말할 때, 발신자가 “비하할 의도가 없었어요”라고 답하는 진부한 레퍼토리가 이 간극에서 나온다. 비하할 의도가 없었다면 무슨 의도가 있었을까? 원래의 의도는 웃음을 유도하려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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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성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엄청난 간극에서 온다고 했다. 고든 호드슨Gordon Hodson과 동료들이 연구에서 밝히듯, “농담은 농담일 뿐”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생각 자체가 사회적으로 약한 집단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유머, 장난,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누군가를 비하함으로써 웃음을 유도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놀려도 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반복된다. 우리가 누구를 밟고 웃고 있는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는 이유이다.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4장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 '당신이 웃는 이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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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유머, 장난,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누군가를 비하함으로써 웃음을 유도하지 말 것, 그런 유머, 장난, 농담에 웃어 주며 동조하지 말 것, 타인을 놀림과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만드는 모든 행위에 진지하게 저항할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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