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연재에서는 페늘롱이 마담 드 맹트농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시간’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한번 점검해 봅니다. 어느 교부는 인간의 영혼은 시계로 포착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마음으로 포착할 수 있는 ‘마음의 시간’에 산다고 말합니다. 페늘롱 역시 물리적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마음의 시간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선용하는 지혜를 ‘끊임없는 자기 추구’가 아니라 ‘성실한 자기 포기’에서 찾습니다. 시간에 관한 페늘롱의 담백한 사유 속에서 비울수록 채워지는 역설의 미학을 음미해 보실 수 있기를 빕니다.
베르사유 궁이 화려하게 증축되고 궁정 문화가 융성하여 고전주의 연극이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 이면에서는 갈등과 비참이 배태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낭트 칙령으로 개신교를 인정하고 30년 전쟁에서도 대외적으로 개신교 편에 서기는 했으나 국내적으로 구교 세력이 강했던 프랑스는 개신교 탄압에 도를 더해가다가 1685년 퐁텐블로 칙령 반포로 낭트 칙령을 철회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약 5만 가정의 개신교도(위그노)들이 국외로 망명했으며, 떠나지 못한 이들은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을 해야만 했으므로, 종교적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절대 왕권을 수립한 루이 14세의 사치한 생활과 방만한 침략전쟁 수행의 연속으로 민생은 갈수록 도탄에 빠져들었다.
페늘롱은 이런 시대에 이상적인 군주 및 정치를 제시했던 사상가이자 신구교의 대립을 넘어 참된 신앙의 길을 모색하고 실천했던 성직자로 길이 기억될 만하다. 왕자의 스승으로서 바람직한 국가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저서 《텔레마코스의 모험》은 20세기 초까지도 프랑스 중등학교의 필독서였으며, 신앙적 권면을 청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쓴 글들은 여러 형태로 편집되어 아직도 애독되고 있다. (중략) 본서는 페늘롱의 사후 발간된 전작집 중에서 두 번째 분야인 “윤리 및 영성에 관한 저작” 중 하나로 실려 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및 윤리에 관한 다양한 문제에 관한 지침과 조언 Instructions et avis sur divers points de la morale et de la perfection chrétienne》을 옮긴 것이다.
―옮긴이의 글에서
시간의 선용과 평범한 행동의 성화에 대하여
―한 사교계 인사를 위한 조언
페늘롱은 여러 궁정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며 신앙을 지도하는 입장이었고, 특히 왕(루이 14세)의 비공식적 배우자이던 마담 드 맹트농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다. 맹트농은 자신처럼 가난한 귀족 집안 딸들을 위해 설립한 생시르 여학교의 운영에 대해 그의 조언을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신앙생활의 세세한 점까지 그에게 의논하곤 했다.
마담 드 맹트농에게
Françoise d'Aubigné, Marquise de Maintenon
당신의 요청이 단지 시간을 선용할 필요성을 입증해 달라는 것이 아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당신도 이미 오래전에 은혜를 통해 깨닫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비유컨대 걸어야 할 길을 이미 반 이상 걸어온 사람들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당신에게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또 머리로 깨달은 것이나 심지어 마음으로 뜻을 품은 것과 정확하고 신실한 실천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니까요.
생각에서 완전하고 거룩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흔한 일이었고, 오늘날은 한층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구주께서는 “그들의 행실과 행위로써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8-20). 이것은 잘만 활용한다면 결코 틀리지 않을 잣대이고, 우리도 이 잣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당신의 삶에는 여러 종류의 시간이 있습니다만, 어느 시간에나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원칙은 무익한 시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시간이 질서 있게, 우리의 구원을 위한 걸음걸음에 들어가며,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손수 부과하시고 우리에게 결산을 요구하실 여러 가지 임무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첫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빈 시간, 우리가 멋대로 쓰거나 낭비할 시간이라고는 주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께서 우리가 이 시간을 어떻게 쓰기를 원하시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다급하고 초조한 열심이 아니라―이런 열심은 우리의 임무를 깨닫게 해주기는커녕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지요―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이들, 즉 권위자들에 대한 성실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는,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으로 단순함 가운데 하나님을 구하며 모든 이중성과 자기애의 거짓된 꾀를 성실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악을 행하는 것뿐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시간 낭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조야하게, 자신을 숨기지 못하고 하는 일들을, 하나님께 속하고자 하는 이들은 종종 그럴싸한 구실을 내세워가며 좀 더 교묘하게 합니다. 이런 구실들은 그들 스스로에게도 너울이 되어서 자기 행동의 추악함을 못 보게 만들지요.
시간을 선용하는 일반적인 수단은 성령께 끊임없이 의지하여 살며 순간순간 그분이 우리에게 주기를 기뻐하시는 것을 받는 데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를 때마다 그분께 여쭙고, 우리의 미덕이 무너지려는 약한 순간에 그분을 의지하며, 눈에 보이는 대상들에 마음이 동해 자기도 모르게 바른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잊고 멀어지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그분을 부르며 그분을 향해 마음을 받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성실한 자기 포기를 통해 부단히 창조주의 손에 자신을 맡기며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하루에 백 번이라도 “주님, 내가 무엇 하기를 원하십니까?”(행 9:6)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에게 당신의 거룩한 뜻 행하기를 가르쳐 주소서”(시 143:10)라고 말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에게 당신의 뜻 행하기를 가르치시어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는 당신께 순종하는 피조물임을 보여주소서. 위대하신 하나님, 내가 당신의 손 아닌 어떤 손에서 평안을 누리겠습니까? 당신의 손을 떠나면 내 영혼은 원수의 공격에 노출되며 내 구원은 위험에 처합니다. 나는 무지하고 연약할 뿐이며, 당신이 내 걸음을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당신이 나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주신 소중한 시간을 제멋대로 쓰게 놔두시면, 나는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눈먼 자처럼 걸어가다가 멸망의 길로 빠질 것이 뻔합니다. 이런 상태로 제가 매 순간 잘못된 선택이 아닌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서는 자기애와 죄와 저주의 일밖에 무엇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니 주님, 당신의 빛을 비추어 내 걸음을 인도해 주소서. 어린아이에게 나이와 연약함에 따라 먹을 것을 주듯, 내게 매 순간 필요한 은총을 주소서. 당신께서 내게 주신 현재의 시간을 거룩하게 사용하여 과거를 고치고 결코 어리석게 미래를 기대하지 않도록 가르쳐 주소서.”
업무나 외적 활동의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의 규칙들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런 일들을 예비하시고 또 주시는 만큼, 우리는 그분을 순순히 따르며 우리의 기분이나 의지, 까다로움, 조바심, 자기 지향 같은 것들을 모두 그분께 복종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다루어야 하는 일이 우리에게 유쾌하냐 아니냐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를 거슬러 일어나는 감정 분출, 성급함, 헛된 기쁨 등을 비롯해 기타 정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외적 활동이든 그 분주함 가운데 함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순수한 영광을 바라보며 시작하여 긴장이나 조바심 없이 마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오락이나 대화의 시간은 우리에게는 가장 위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장 유용한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현존 안에 더욱 신실하게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듯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깨어 있는 연습이지요. 영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되, 습관적으로뿐 아니라 가능한 한 적극적으로, 믿음이 주는 단순한 시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은혜를 향해 온유하고 평화로운 의존을 유지하며 그것을 자신의 안전과 힘을 얻기 위한 유일한 원리로 삼는 것이지요. 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대화나 교제 속에 은밀히 숨어드는 악을 몰아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게끔 현명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특히 권세 있는 이들, 그 언행으로 선이든 악이든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자유 시간은 대개 우리 자신에게 가장 즐겁고 유용한 시간입니다. 자유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과 좀 더 내밀한 교제 가운데서 힘을 (신체적인 힘도) 회복하는 것이지요. 기도는 너무나 필요하고 많은 유익의 원천이므로, 그 소중함을 아는 영혼은 혼자 있게 되자마자 기도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 가지 시간에 대해 달리 말할 것이 있을지도 모르고, 지금 제게 언뜻 떠오르는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대단한 것들은 아닙니다. 하나님 뜻이라면 다른 생각들도 주실 테고, 그러지 않으신다면 딱히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필요치 않다면, 잊어버려도 무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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