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편지의 주제는
‘작은 일들에 충성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에 대하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자주 고백하지만, 그분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처럼 진지하게 숙고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페늘롱은 이번 편지에서 자신의 전부를 주신 하나님께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냐고 반문하며, 전부를 드리는 사랑의 실제를 작은 일들에 대한 충성에서 찾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사랑의 참된 모습은 언제나 간과하기 쉬운 아주 평범한 때, 아주 사소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반드시 사랑할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어떤 식으로 그분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깨달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그분의 너그러운 손에서 받은 것 말고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게 그분이 베풀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는 무(無)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을 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도 그분으로부터 왔고 그분이 지으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녀들을 측은히 여기는 아버지처럼 자애로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애초에 그 자녀들을 지으신 재료가 흙인 것을 아시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우리가 헤매던 죄악의 길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길 잃은 양을 찾느라 지치도록 애쓰는 목자처럼 쫓아다니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찾아다니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를 찾아낸 다음에는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서 우리와 우리의 질고를 도맡아 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그 지극한 순종은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그분을 사랑해야 할지를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 한쪽은 하나님께 드리고 다른 쪽은 세상과 오락을 위해 남겨 둔다든가, 진실과 거짓, 하나님과 세상을 적당히 섞으려 한다든가, 제단 앞에서는 하나님께 속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을 그곳에 버려둔 채 나머지 시간은 세상에 바친다든가, 하나님께는 표면적인 애정만 드리고 실질적인 애정은 세상에 둔다든가 하는 식으로, 두 마음을 가진 비열한 자들처럼 할 것입니까? 그런 사랑은 하나님께서 거부하십니다. 그분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런 유보를 용납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전부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그분은 이렇게 명시하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을 온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시기까지 했는데, 그분이 종교 예식에 만족하시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전부를 드리지 않는다면 받지 않으십니다.
사실, 영원부터 우리를 사랑하신, 아니 죄악의 구렁에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을 반쯤만 사랑한다는 것은 은혜에 대한 배반이 아닙니까? 타락한 세상도 배은망덕에는 충격을 받았다고 떠듭니다. 세상도 아들이 자기한테 삶을 준 아버지에게 감사치 않는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그분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지속될 삶을 주셨으며, 우리를 복되게 하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아버지를 합친 이상의 아버지라고, 한 교부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대체 우리에게서 무엇을 사랑하셨을까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의 대상에게서 발견하는, 또는 추정하는 어떤 좋은 점 때문이니 말입니다. 대체 그분은 우리에게서 그분의 사랑을 받을 만한 무엇을 발견하셨을까요? 우리는 창조되기 전에는 무(無)였고, 창조된 이후로는 죄악될 뿐입니다.
오, 얼마나 과분한 선하심인지요! 우리에게 그토록 크나큰 선을 베푸신 분, 우리를 지탱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분이 단 한 순간이라도 외면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전능하신 손이 우리를 끌어내셨던 무(無)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도 두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영원한 복락을 약속하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잠시 현혹할 뿐인 세상을 비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죽는 순간 세상은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 떠넘길 테니, 이때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무것도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 우리가 그분을 대했던 대로 우리를 대하실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을 섬겼다면, 그분은 정당한 보응으로 우리를 세상이라는 비참한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사랑하라고 명하신 율법이 기록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잊고 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상기시키기 위해서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우리의 배반을 아시고 우리 약함을 속속들이 아시므로, 우리를 그분께로 돌이키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하셨습니다. 그분은 만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면 영원한 상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징계를 내리겠다고 엄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위협 속에서도 우리는 그분의 긍휼과 자비를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왜 그토록 자주 엄히 말씀하시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징계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악용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지금이라는 시간을 선용하고 그분을 노엽게 하지 맙시다. 날마다 “내일부터, 내일부터”라고 미루는 나약한 자들처럼 되지 맙시다. 온전히 그분께 속하겠다는 강한 결심을 하고, 오늘부터, 지금부터 시작합시다.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것에 의지한다면 얼마나 무모한 일일까요! 미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추시는 심연이며, 미래가 우리의 것이 될 때라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그분의 일을 한다고 할 만큼 우리 자신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분이 지금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선용합시다. 우리의 회심도 아마 그 은혜에 달려 있을 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념들은 강해져서 다스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지금 우리의 선택을 하고 하나님께 귀 기울입시다.
“내 백성아, 너희가 언제까지 바알과 나 사이에서 마음이 나뉘려느냐.
어느 쪽이 진짜 신인지 결정하라.
만일 나이거든, 나를 따르고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
만일 바알이거든, 그를 따르고 세상을 따르며 그에게 헌신하라.
그러면 죽는 날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구원할지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다른 모든 애착에서 완전히 떠나기란 어렵다고 말합니다. 글쎄요! 당신을 지금처럼 만들어 주신 분을 사랑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습니까? 당신이 당신의 창조주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기 꺼리는 것은 우리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마음이 나뉘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까? 끊임없이 정념들에 끌려다니면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고, 즐거움 가운데는 씁쓸함이 스며들고, 노상 갈팡질팡하는 것이 행복합니까? 이처럼 온당치 못하게 분열된 마음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비겁한 영혼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엄격하다고 하며 그 엄격함을 누그러뜨리려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누가 이생에서부터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자기애가 뭔가 선한 결과를 가져오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만 속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영혼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이 있을 때, 영혼은 선한 양심이 주는 평안을 맛보며, 요동치 않고 행복합니다. 그에게는 위대함도, 부도, 명성도, 시간이 흔적 없이 실어갈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 영혼은 자기가 사랑하는 분의 뜻밖에는 원치 않습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신랑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신랑을 기다리며 항상 깨어 있습니다. 번영이 그 영혼을 교만하게 만들지 못하고 역경이 그의 기를 꺾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이처럼 자기 의지로부터 초연해지는 데 있지 교묘한 추론에 있지 않습니다.
…덕은 길게 기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내 아버지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실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또한, 신앙심이란 사랑 없는 행함에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무런 행함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무위하지 않으니까요. 사랑이 우리 안에 있으면,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게 합니다. 지병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다면,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기꺼워하실 만한 무엇이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다음에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고 오로지 그분에 대한 사랑을 위해 사랑하는 단계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만일 무엇인가가 그렇게 사랑받을 만하다면, 무한히 사랑스러운 분이야말로 그렇지 않을까요?
프랑수아 드 살은 큰 덕목들과 작은 충성들은 마치 소금과 설탕과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설탕은 더 감미로운 맛을 내지만, 그리 자주 쓰이지는 않지요. 반면, 소금은 생명에 필요한 모든 음식에 들어갑니다. 위대한 덕목들은 드물고, 발휘될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그런 기회가 올 때면, 이전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준비하게 되지요. 위대한 희생정신으로 고무되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데서 행한 혁혁한 행동이나 스스로 대단하다 여기는 노력 속에서 느끼는 자기만족으로 버텨 나갑니다. 그에 비하면 사소한 기회들은 예측할 수 없이 아무 때나 찾아오며, 우리를 자신의 교만과 게으름과 거드름과 성마름과 슬픔과 끊임없이 씨름하게 함으로써 매사에 우리의 의지를 깨뜨리고 우리에게 아무런 여지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런 기회들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본성은 숨 쉴 틈도 없이 자신의 모든 성향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사소한 일들에서 자기 취향과 습관을 따를 자유와 맞바꿀 수만 있다면 아무리 격렬하고 고통스럽다 해도 하나님을 위해 큰 희생을 몇 차례 치르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은혜가 유지되고 인간 본성의 덧없는 선의들과 구별되는 것은 작은 일에 대한 충성에서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우리 행동보다는 그 행동을 하게 하는 사랑의 동기를, 우리 의지의 순종을 찾으신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을 겉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는 점들은 전혀 보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순수한 의도, 그분의 손안에서 순순히 무엇이든 기꺼이 하려는 의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초연함입니다. 이 모든 것은 특별한 때보다 평범한 때에 더 자주 일어나며, 우리의 자존심을 다치게 할 우려는 적지만 더 엄격하게 우리를 시험합니다. 때로는 큰 이해관계보다 사소한 일에 집착할 때도 있습니다. 거액의 자선을 하기보다 당장의 오락을 그만두기가 더 어려운 것이지요.
사소한 일들은, 죄가 되지 않으리라 여기고 또 스스로 그런 것에 별로 집착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만큼 오히려 더 쉽게 우리를 실족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앗아가실 때라야 비로소 그 박탈의 고통으로 인해 우리의 집착과 습관이 지나쳤고 변명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런 사소한 것들을 소홀히 함으로써 언제든 가족과 아랫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되지요. 우리의 행동이 구체적인 데서 해이하고 변칙적이라면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이 진정성 있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사소한 것이 문제가 되자마자 굴복하면서 가장 큰 희생은 주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허울뿐인 믿음일까요?
하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영혼이 사소한 일들을 소홀히 함으로써 불성실에 익숙해진다는 점입니다. 성령을 근심하시게 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됩니다. 반면, 참된 사랑은 아무것도 작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또는 슬프시게 하는 모든 것이 항상 크게 보입니다. 참된 사랑이 영혼을 불편하고 까다롭게 만든다는 말이 아니라, 그 충성됨에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과 함께 행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들에 대해서는 크건 작건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극히 사소한 일들에까지 충성되고 정확하다는 것은 마지못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안하고 근심 많은 영혼이 갖는 두려움이나 고민과는 전혀 다른,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끌려가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하는 일만을 하고자 할 뿐, 하지 않는 다른 일을 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영혼을 압박하시어 극히 사소한 것들까지 간섭하시고 모든 자유를 앗아가시는 것처럼 보일 때, 사실상 영혼은 마음껏 풀러나 그분 안에서 깊은 평화를 누리는 것이지요. 오, 그런 영혼은 얼마나 복된지요!
천성적으로 세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소한 것들에 대해 더 확고한 규범을 스스로 확립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버릇이 들어 그 결과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념들이 은연중에 깊어지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대해 겪었던 최악의 경험조차도 잊어버립니다. 부단한 충성에 자신을 굴복시키기보다 자신에게 없는 강인함을 다짐하며 이미 무수히 속아왔던 자신의 용기를 믿는 것입니다. 별거 아니야, 라고 말하지요. 그래요, 별거 아닙니다. 하지만 그 하찮은 것이 당신에게는 전부입니다. 하찮을망정 너무나 사랑하여 하나님께도 내놓기를 거부하는 무엇이지요. 내놓지 않을 구실을 찾기 위해 별거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은 하나님께 거역하여 집착하는 무엇, 당신을 멸망시킬 무엇입니다. 사소한 것들을 가볍게 여긴다고 위대한 정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처럼 크나큰 결과를 갖는 것을 사소하게 여기는 것은 당신의 시야가 좁기 때문이지요. 작은 것들에 주의하기가 힘들면 힘들수록, 부주의하여 실수할까 두려워하고 자신을 경계하며 자신과 해이함 사이에 철통 방벽을 쳐야 합니다. “작은 것을 무시하는 자는 점점 망하게 된다”는 말씀대로입니다.
당신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당신에게 모든 것을 빚진 친구가 있는데, 이른바 크다고 여겨지는 드문 기회에는 당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평소 생활에서는 당신에게 배려도 경의도 보이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소한 일들에 끊임없이 신경 쓰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러자면 우선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이야말로 당신에게 필요하고 또 마땅한 참회이며, 그것이 당신에게 평안과 확신을 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혼란과 같은 실수가 반복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차츰 이 즐겁고도 쉬운 마음 상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세심하되, 거북하거나 부대끼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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