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편지의 주제는
‘분심分心과 슬픔을 예방하는 방법에 대하여’입니다.
페늘롱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께 길을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번 연재에서는, 삶 속에서 우리를 온갖 상념으로 몰아넣는 분심과 슬픔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살펴보고 있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그런 상념을 다루는 태도의 핵심이, 내맡김을 선택하는 ‘적극적 수동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삶에 이르는 참된 길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태도, 그분의 완전하심에 내맡기는 태도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심分心과 슬픔을 예방하는 방법에 대하여’
당신은 두 가지 문제로 고심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분심을 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에 맞서 버티는 것이지요. 분심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부러 생각을 집중하려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으로만 가능한 일을 본성적인 힘과 노력으로 이루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당신의 의지를 아무 유보 없이 내어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분의 섭리에 자신을 내맡기고 받아들이지 못할 어떤 힘든 상태도 미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대한 생각들에서도 앞질러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하지만 당신이 굳이 구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런 생각들을 허락하실 때는, 결코 열매 없이 지나가게 하지 마십시오.
본성적으로 싫고 거부감이 들더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정신에 떠오르게 하시는 모든 것을 그분께서 당신의 믿음을 훈련하시는 시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이 멀리서 바라보며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때가 오면 실행에 옮길 힘이 있을지 알고자 애쓰지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 그때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런 십자가들을 생각하는 순간의 은총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들을 주실 때에 달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내어 맡김의 기초가 놓이면, 조용히, 신뢰하는 마음으로 전진하십시오. 당신 의지의 방향성이 뭔가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에 의지적으로 집착하여 변질되지 않는 한, 그런 방향성은 항상 유지될 것입니다.
당신의 상상은 수천 가지 헛된 것들 위를 떠돌 테고, 당신이 처한 장소에 따라, 그리고 대상이 생생하냐 희미하냐에 따라 다소간에 요동칠 것입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상상이란, 성 테레사가 말했듯이, 집 안의 미친 여자입니다. 끊임없이 소란을 떨어 정신없게 만듭니다. 정신도 그에 끌려가는 터라 상상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이미지들에 주목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정말로 주의가 분산됩니다. 하지만 그런 분심이 의지적인 것이 아닐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멀어지지 않습니다. 해로운 것은 의지적으로 딴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결코 분심을 원치 않는다면, 결코 산만해지지 않을 테고, 당신의 기도도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옳습니다. 분심이 드는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굳이 싸울 것도 없이 하나님 쪽으로 조용히 돌아서면 분심은 사라집니다. 분심을 알아차리지도 못한다면, 마음이 산만해진 것도 아니겠지요. 분심이 든다 싶으면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십시오.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릴 때마다 하나님의 현존으로 돌아가는 꾸준함은 더욱 자주 그분의 현존을 누리는 은총을 가져다 줄 것이며, 또한, 제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분의 현존에 친숙해지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분심이 들 때마다 그 대상들로부터 즉시 돌아서기를 꾸준히 계속하다보면, 좀 더 자주, 그리고 쉽게 묵상에 잠기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 노력으로 그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노력은 편안한 마음으로 임해야 할 일이나 대화에서 당신을 어색하고 신경질적이고 초조하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은 항상 하나님의 현존을 놓칠까봐 안달하고, 항상 그 현존을 되찾기에 급급하며, 상상의 온갖 환영들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현존은 그 빛과 감미로움으로 당신을 도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고려해야 할 다른 모든 것에 쉽사리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대신, 오히려 당신을 항상 불안하게 만들어 당신이 처한 위치에 따르는 외적 기능들조차 수행할 수 없게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느낌을 놓칠까 불안해하지 말고, 특히 추론과 사색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구하려 하지도 마십시오. 일상생활 속에서, 당신이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어렴풋이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당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그 당장은 뭔가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 해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말이 진실이 될 것입니다. 제어할 수 없는 마음이 산만해지는 데 대해서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종종 분심이 들까 두려워한 나머지 마음이 산만해지고, 분심이 들었다는 데 대한 후회로 또 산만해지지요.
여행을 하는 사람이 쉬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대신 넘어질 만한 데를 찾느라, 또 간혹 넘어졌다고 해서 자기가 넘어졌던 곳을 줄곧 뒤돌아보느라 시간을 보낸다면, 당신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앞으로 걸어가라고 말하겠지요. 저도 당신에게 같은 말을 합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멈추지 말고, 계속 걸어가십시오. 사도가 말한 대로입니다. “너희가 항상 더욱 풍성하게 되도록 걸으라.” 하나님 사랑의 풍성함이 당신의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나 집착보다 더 확실히 당신을 고쳐 줄 것입니다.
종종 슬픔은 하나님을 찾건만 만족할 만큼 충분히 느낄 수 없다는 데서 옵니다. 그분을 느끼기를 원하는 것은 소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애를 위해, 자신이 위로받기 위해, 그분을 소유한다고 확신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낙심하고 용기를 잃은 본성은 순수한 믿음 가운데서 자신을 보기를 애타게 원하며,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오려 무진 애를 씁니다. 그런 상태에는 의지될 만한 것이 전혀 없으며 허공에 뜬 것 같으므로, 자신의 진보를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되면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이런 상처 입은 감정을 회개의 감정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자기애 때문에 스스로 완전하다고 느끼는 기쁨을 원하고, 그렇지 못한 데 대해 자책합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나 참을성 없고 거만하고 심기 불편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한심한 잘못입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있기나 하다는 말입니까! 우리 마음속의 평온을 잃음으로써 하나님의 평화에 연합할 수 있기나 하다는 말입니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왜 그토록 많은 것으로 염려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발치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긴 다음에는 많은 것을 하지 않더라도 하는 일이 다 잘됩니다. 장래 일을 믿고 맡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나도 원하며, 앞일에 대해서는 아무 염려 없이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 그분의 뜻을 수행하기에 전념하는 것이지요. 날마다 그날의 선과 악으로 충분합니다. 이처럼 나날이 하나님 뜻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 안에 그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추신 미래의 시간을 알려 한다면 신실치 못한 일이요 이교도와 같은 불신이 될 것입니다. 미래는 그분께 맡깁시다. 그것이 달든 쓰든, 길든 짧든, 그분 소관이니, 그분 보시기에 좋으신 대로 하실 것입니다. 미래가 어떠하든 간에, 미래에 대한 가장 완벽한 준비는 자신의 뜻에 대해 죽고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만나에 온갖 맛이 들어 있듯이, 이런 전반적인 마음 자세에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를 두실 어떤 상태에도 적합한 모든 감정과 모든 은총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에 준비가 되면, 마치 심연 속에서 발 디딜 곳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과거에 대해서나 미래에 대해서나 담담해집니다. 자신으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이 생각나지만, 눈 딱 감고 하나님의 품으로 뛰어듭니다. 자신을 잊고, 자신을 잃는, 이런 자기 망각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회개입니다. 모든 회심은 결국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전념하는 데 있으니까요. 이 망각은 자기애의 죽음입니다. 자기를 망각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반대하고 자신을 정죄하고 심신을 괴롭히는 것보다 백배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 망각은 자기애의 멸절이니, 자기애에 더 기댈 것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마음이 넓어지고, 지금껏 짓눌려온 자신의 모든 무게를 벗어버리고 편안해집니다. 그것이 얼마나 곧고 단순한 길인지 놀라게 됩니다. 끊임없는 다툼과 부단히 새로운 행동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했건만, 실제로는 거의 할 일이 없습니다. 미래에 대해서나 과거에 대해서나 별로 생각할 것 없이 지금 이 순간 마치 손잡아 인도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듯 하나님을 신뢰하며 바라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설령 주의가 산만해져서 그분을 놓쳐버린다 하더라도, 그런 상태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를 느끼게 하십니다. 만일 잘못을 저질렀다면 회개를 할 테고, 그것은 사랑으로 충만한 고통일 것입니다. 등졌던 그분께로 다시 돌아서면 됩니다. 죄는 추악해 보이지만, 죄에서 돌이키는 겸손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허락하시는 목적인 겸손함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과오에 대해 교만이 쓰라리고 초조하고 괴로운 상념들을 안겨 주는 만큼, 잘못을 저지른 다음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영혼은 차분하고 믿음으로 든든합니다.
당신은 이처럼 단순하고 평화로운 돌이킴이 당신을 짓누르는 과오에 대한 온갖 회한보다 얼마나 더 쉽게 당신을 고치는지 경험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단지 과오를 깨닫는 그 순간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당신 자신과 시시비비 따져본들 소용없습니다. 당신이 기준 삼아야 할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닙니다. 당신이 자신의 비참에 대해 한탄하는 한, 당신의 마음속에는 당신 자신과의 다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불쌍한 다툼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손을 뻗쳐 진창에서 끌어내 주겠습니까? 당신입니까? 거기 빠진 것은 당신 자신이지만, 스스로 나올 힘은 없지요. 게다가, 그 진창이란 당신 자신이 아닙니까.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나쁜 것은 당신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 당신 자신과 입씨름을 하면서, 당신의 약점들을 봄으로써 감수성을 한껏 부풀려 벗어나려 해보십시오. 당신은 그렇듯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자기연민에 빠질 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저 한 번 돌아보시는 눈길이, 그렇게 당신 혼자 애쓰는 것보다 훨씬 더 당신의 괴로운 마음을 가라앉혀줄 것입니다. 그분의 현존은 항상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줍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지요. 그러니 당신 자신에게서 나오십시오, 그러면 평온을 누릴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나오느냐고요? 그저 하나님 쪽으로 조용히 돌아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주의가 산만해진 것을 깨달을 때마다 다시 돌아서기를 꾸준히 버릇 들이면 됩니다.
우울질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슬픔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단순히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약을 잘 쓰고 섭생에 힘쓰면 그런 슬픔은 줄어듭니다. 항상 되돌아오기는 하지만, 의지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그런 슬픔을 주실 때는, 신열이나 기타 신체적 질병처럼 담담히 견딜 일입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깊은 어둠에 잠겨 슬퍼하겠지만, 순수한 신앙에서 힘을 얻은 의지는 그 모든 인상들을 기꺼이 겪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하나님께 순복하여 평안합니다. 무엇을 느끼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원하고, 갖지 못한 것은 무엇 하나 원치 않습니다. 자신이 겪는 상황에서 전혀 벗어나기를 원치 않으니, 십자가든 위로든 하나님께서 나눠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말처럼 환란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각의 기쁨이 아니라 순수한 의지의 기쁨입니다.
불신자들은 온갖 즐거움의 한복판에서도 결코 자신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므로 불편한 기쁨을 누립니다. 무엇인가 역겨운 것을 밀쳐내고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 감미로운 것을 맛보고 싶어 합니다. 반대로, 신실한 영혼의 의지는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습니다. 그런 영혼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온갖 고통스러운 것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원하고 사랑하고 끌어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떨쳐버릴 수 있을 때에도 그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원함조차도 자기 욕망일 테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맡긴 상태를 거스르는 것이 될 테니까요. 신실한 영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앞지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무언가가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내맡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진 마음속에는 강물보다 더한 평안이, 바다의 심연과도 같은 공의가 넘친다는 것이 이사야의 표현입니다. 만일 무언가가 정신을 평온하게 만들고 그 염려와 두려움을 쫓으며 사랑의 유약으로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다면, 그 모든 행동에 활기를 부여하고 얼굴과 말에까지 성령의 기쁨을 퍼져나가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품 안에 거하는 이 단순하고 자유로운, 아이 같은 행동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생각한 나머지 망쳐버리지요. 이성적 사고의 유혹이라는 것이 있으니, 그것도 다른 유혹들처럼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감각적이고 초조하고 도전적인 자기 몰입이 있는데, 그것은 전혀 유혹으로 보이지 않는 만큼 더욱 미묘한 유혹으로, 사람들은 그것을 복음서에서 권하는 깨어 있음으로 여기고 한층 더 빠져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시는 깨어 있음이란 항상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며 그에 대해 주신 증거를 따르는 데 주의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라는 것이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몰두하여 노심초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 있음을 구실 삼아,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생에서 발견하기를 원하시지도 않는 일을 발견하려고 고집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내적인 삶과 순수한 믿음의 열매를 잃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부단히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그분의 현존을 등지겠습니까? 그분은 ‘항상 너희 자신을 스스로 걸어가는 지향점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내 앞에 걸으라. 그리고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성령 충만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서 여호와를 봅니다.” 또 이렇게도 말했지요. “주님만이 내 발을 원수의 올무에서 건지는 분이시기에, 내 눈은 언제나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의 발은 위험에 처해 있지만, 그의 눈은 항상 위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위험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볼수록, 그분과 연합됩니다. 그분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비참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봅니다. 올곧고 순수한 영혼은, 비록 단순할지언정, 그 무한한 빛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어둠 안에서는 우리의 어둠 그 자체 말고는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오, 나의 하나님! 제가 당신을 바라보기를 그치지 않는 한, 저는 제 모든 비참함 가운데 저를 보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보다도 당신에게서 더욱 저를 볼 것입니다. 진정한 깨어 있음이란 당신에게서 당신의 뜻을 보고 이루고자 하는 데 있지, 제 의지의 상태에 대해 끝없이 시비를 가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외적인 관심 때문에 당신만을 볼 수 없을 때는, 기도 속에서 제 감각의 모든 통로를 막고, 만인 가운데서 모든 일을 행하시는 주님 당신만을 보기 원합니다. 저는 제 안팎 어디서나 당신의 의지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쁘게 보며, 복된 자들과 같이 끊임없이 ‘아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항상 거룩한 시온의 찬가를 노래할 것입니다. 악한 자들에게도 당신을 송축하리니,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의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의 공의롭고 거룩하고 전능하신 뜻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당신 자녀들에게 허락하신 이 정결한 정신의 자유 가운데서, 저는 단순하게, 명랑하고 확신에 차서 행동하고 말하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그늘을 지날 때에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나와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위험도 자청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의 섭리의 징표들이 함께하지 않고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징표들이야말로 제 힘이고 위로입니다. 당신의 부르심이 저를 붙드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 저는 당신이 제게 주시는 자유로운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묵상과 기도와 피정에 바치겠습니다. 당신께서 친히 저를 부르셔서 외적인 소임들을 주시지 않는 한, 저는 이 복된 상태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당신에게서 떠나는 듯이 보이겠지만, 당신이 저와 함께 떠나시겠지요. 그리고 이런 겉보기만의 떠남에서, 당신은 저를 품에 안고 가시겠지요. 저는 피조물들 간의 교제에서 결코 저 자신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묵상이 행여 그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줄어들게 하거나 대화를 무미건조하게 만들까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을 즐겁게 하는 한에서만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를 원하니까요.
만일 당신이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역에 저를 사용하시고자 한다면, 기꺼이 저를 내어드립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 대해서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저는 당신께서 제게 넘쳐나게 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흘려보낼 것입니다. 저는 더듬거리다가 저 자신에게로 돌아오거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소임이 아무리 위험하고 힘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도, 저는 올곧은 의지를 가지고서 당신 앞에서 단순하게 처신할 것입니다. 저를 지켜보시는 아버지의 선하심이 얼마나 크신지를 아니까요. 아버지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서 어떤 교묘함도 원치 않으십니다.
만일, 반대로,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저를 쓰실 의향이 없으시다면, 저는 굳이 저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앞지르지 않으며, 당신이 제게 주신 다른 일들을 해나갈 것입니다. 당신께 내어 맡기는 기쁨을 알려 주셨으므로, 저는 아무것도 원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으며, 모든 것에 대비하고 모든 것에 무용해지는 데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저를 찾든 버리든, 제가 알려지든 무시당하든, 박수갈채를 받든 공격을 받든, 제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제가 추구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고, 당신과 당신의 사랑이라는 당신의 탁월한 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입니다. 온갖 좋다는 여건들이 제게는 무의미합니다. 아멘.
'작업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전연재] 프랑수아 드 페늘롱, 《그리스도인의 완전》#4 (0) | 2022.05.03 |
---|---|
[사전연재] 프랑수아 드 페늘롱, 《그리스도인의 완전》#2 (0) | 2022.05.03 |
[사전연재] 프랑수아 드 페늘롱, 《그리스도인의 완전》#1 (0) | 2022.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