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의 주제는
‘자신의 결점이나 타인의 결점을 보고
놀라거나 낙심하지 말 것에 대하여’입니다.
타인과의 관계가 내 의사나 선호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인간관계는 행복의 원천이기만 할 겁니다. 이번 서한을 보면서 인간관계는 동서고금이나 지위고하를 무론하고 어디서나 고민거리가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페늘롱은 타인의 결점으로 인해 관계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마담 드 맹트농에게, 인간의 온갖 미덕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라는 조언과 함께, 그렇다고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일관하지는 말라고 종용합니다. 페늘롱의 중용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타인의 결점 대신 자신의 결점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합니다. 타인의 결함에 대한 강한 반감 이면에는 자기중심성이 있으며, 그 결함이나 타인의 결함이나 인류가 처한 비천함의 발로라고요. 이 부분에서 페늘롱은 타인과의 관계라는 수평적 차원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수직적 차원의 문제로 승화시킵니다. 그분은 오히려 자신의 결점들과 씨름하는 자들을 흡족해하시는 분이며 당신도 그것으로 만족하라고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나 타인의 결함에 조금 더 너그러워져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번 서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에 저도 밑줄을 그었습니다. “사람은 완전해질수록 불완전함에 관대해집니다.”
‘자신의 결점이나 타인의 결점을 보고 놀라거나 낙심하지 말 것에 대하여’
―궁정의 한 부인을 위한 조언
사람들의 연약함과 타락에 여전히 놀란다면 그것은 아직 일반적인 인간의 비참도 자기 자신의 비참도 충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아예 선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악에 놀랄 것도 없겠지요. 인간은 당최 아무것도 아니요 어쩌면 그 이하인데도 무엇이나 되는 듯이 여기기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할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돌감람나무인 우리는 그분께 접붙여져서, 우리 자신의 쓴 열매 대신 그분 안에서 미덕의 단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인간의 온갖 미덕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십시오. 인간의 미덕은 자기만족과 자신감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사람의 눈에 높아진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6:15). 이것이 삶의 매 순간 일어나는 내적인 우상숭배입니다. 이 우상숭배는 미덕의 광채로 감싸여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 눈에 더 엄청나게 보이는 다른 많은 죄악들보다 한층 더 가증합니다. 단 하나의 진리, 단 하나의 올바른 판단이 있을 뿐이니, 그것은 하나님 자신처럼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연약함이나 격정이나 무지 때문에 저지르는 무시무시한 죄들이, 자기 의로 가득 차서 자신이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모든 것을 자신의 탁월함에 돌리는 영혼의 미덕들보다 차라리 낫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전체를 뒤엎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자기애로 인해 타락한 우리의 취향이나 잘못된 위대함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맙시다. 유일한 지고의 위대함 앞에서 아주 작아지는 것 말고는 위대한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것을 지향하는 성향이 있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손안에서 우리를 낮추시고 작게 만드십니다. 그분의 손길에 맡기십시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로 말하더라도, 그들은 비참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완전함을 허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불완전함에 가로막혀 하나님께 곧장 지름길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짐, 쓸데없는 온갖 장비들의 짐을 너무나 무겁게 지고 있어서 빨리 걷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 짐들을 행여 잃을까봐 열심히 지고 가지요. 어떤 이들은 자신들에게 허용된 듯이 보이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항상 샛길로 둘러가면서 자신이 똑바로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극히 사소한 이해득실이나 간섭도 못 견딜 만큼 여전히 모든 것에 집착하면서 자신은 더 이상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상상할 정도로 자기 마음을 모릅니다. 남의 생각은 성전의 저울로 달아보면서 자기 생각에는 지극히 관대하여, 정의와 성실을 떠들면서 자신은 불의를 일삼지요. 자기가 시기하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는데,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시기심은 아주 사소한 결점까지 크게 과장할 뿐 아니라, 속에 가득한 것을 감추지 못하고 입 밖에 내어 자기도 모르게 못마땅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딱히 그럴 생각이 없으면서도 은근한 비판과 악담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기심으로 좁아진 마음은 자기 좋을 대로 행하기 위해 자신을 속입니다. 나약하고 확신이 없으며 소심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비굴하게 아첨하고 아부할 태세입니다. 너무나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타인을 돌아볼 시간도 생각도 감정도 남지 않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가 누리는 거짓 평화를 뒤흔들어 다른 사람을 향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두려움에서 억지로 그렇게 할 뿐입니다. 그 본의 아닌 충동에 잠시 내몰리다가, 곧 다시 자기 속으로 가라앉아 자기가 모든 것이요 자기 하나님이 되어버리면, 모든 것이 자기나 자기와 관련된 것을 위해 존재할 뿐 그 밖에 온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야심도 탐욕도 불의도 배신도 원치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으로 이런 악덕들과 반대되는 모든 미덕을 항상 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때 없이 찾아드는 이상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에게 사로잡힌 영혼 특유의 이 모든 악덕을 잠시 덮어놓을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가장 통탄하는 점입니다. 이 점 때문에 저는 순수한 신앙과 철저한 자기 죽음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다시는 돌이키지 않을 신앙을 그처럼 열망하는 것입니다. 흔히 이런 완전함은 너무 고결한 것이라 실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지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또 다시 자기애에 빠져,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죽을 때까지 비겁하게 넘어졌다 일어났다 하기를 계속하십시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는 한, 비참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좀 더 고상할 때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모습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외적인 것들은 진짜 버팀목이 되지 못합니다. 자기애가 뒤섞인 이런 신앙생활이야말로 우리를 오염시키고, 세상의 빈축을 사고, 하나님께서도 토해내시는 것입니다. 언제가 되어야 우리도 이런 것을 토해내게 될까요? 언제가 되어야 이런 병폐를 근절할 수 있을까요?
신앙이라는 것을 거기까지 밀고 나가면, 사람들은 겁에 질려 너무 멀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지 못한 신앙은 나약하고 시기하며 과민하고 자기중심적인 데 머뭅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없애버릴 만한 용기와 신실함을 지닌 사람은 드물고, 그러다 보니 신앙을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드뭅니다.
성급함이나 부실함 같은 결점들이 성실한 신앙생활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나약함이나 망상, 자기애, 습관 등에서 오는 다른 결점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참된 의도와 양립한다는 점은 그만큼 잘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의도는 충분히 순수하지도 충분히 강하지도 못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약하고 불완전하다 해도, 그 한계 안에서는 진실한 것입니다. 탐욕을 부리면서도 자신의 탐욕을 깨닫지 못합니다. 현명한 일처리라느니 손실 예방이라느니 장래를 위한 준비라느니 하는 그럴싸한 구실들로 포장되니까요. 시기하면서도 자기 안에 이런 저열하고 악의적인 감정이 숨어 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시기심은 너무 큰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다른 것으로 위장하므로, 때로는 시기심에 시달리는 당사자를 가까이서 비판적인 눈으로 관찰하는 이들보다 더 잘 속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는 날카롭고 과민하고 까다로우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도 합니다. 모두 이기심 탓이지만, 이기심은 온갖 아름다운 이유들로 변명하기 마련이지요. 그 변명을 듣다 보면 끝이 없고,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컨대,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선량한 사람들도 선한 의도와 뒤섞인 불완전함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의지라 해도 여전히 약하고 나뉘어 있으며 은밀한 자기애의 충동들로 견제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결함에 대한 당신의 강한 반감 자체가 큰 결함입니다. 타인의 비참을 멸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비참이니까요. 그것은 인류가 처한 비천함 위에 자기만 우뚝 서려는 교만입니다. 그 비천함을 제대로 보려면 같은 높이에서 보아야 합니다. 오 맙소사! 도대체 언제가 되면 자신에게서나 타인에게서나 아무 흠도 보지 않게 될까요? 하나님만이 모든 선이시고, 피조물은 모든 악입니다. 게다가 당신을 스쳐 가는 인상들이 너무 강합니다. 당신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그런 인상들을 너무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대신 침착하게 바라보면 안정적인 관점들을 가질 수 있고, 그런 관점들은 모든 특정한 경우에 적용되어 세세한 것들을 푸는 마스터키가 되어 줄 것이며,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인데 말입니다.
당신은 인류 전체를 멸시하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당신이 온 인류를 경멸해 마땅한 만큼 경멸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빛만이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악의 심연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악을 철저히 깨달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섞어두신 선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이처럼 선악이 섞여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알곡 사이에 원수가 뿌린 가라지입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없애려 하지만, 주인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 13:25-29).”
중요한 것은 그처럼 한심한 광경을 보고도 낙심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인간에 대한 불신을 너무 확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성이 개방적이고 남을 잘 믿는 사람들은 그런 신뢰와 개방성 때문에 상처를 입고 한층 더 움츠러들고 의심이 많아지기도 합니다. 마치 겁먹은 나머지 더 용감해지는 겁쟁이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이런 면에서 조심할 점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처한 위치에서는 인류의 각종 비참이 줄지어 지나가는 것이 보일 뿐 아니라, 시기심, 질투심, 성급한 판단, 악담 같은 것들이 무해한 것들마저 오염시켜 사소한 결점들까지 무자비하게 과장하게 되니까요. 그 모든 것이 떼 지어 공격해 오므로, 당신의 인내심과 자비심도 지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 버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종들을 따로 지키십니다. 이들은 모든 일을 하지는 않는다 해도 부패한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리고 그들 자신의 타고난 것에 비해서도 많은 일을 하지요. 그들은 자신의 결점들을 인정하고 겸비하며 결점들과 싸워 고쳐 나갑니다. 사실 그 과정은 느리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고쳐지지요.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을 높이며, 하지 않는 일에 대해 스스로 꾸짖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흡족해하시니, 당신도 그것으로 만족하십시오.
만일 당신도 저처럼 하나님을 좀 더 잘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이 진리의 예배에 더욱 더 힘쓰십시오. 이 예배 가운데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피조물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며, 모든 돌아감은 불신이요 이기심으로 추방됩니다. 오, 만일 당신이 이 복된 상태에 있다면, 그에 미치지 못할 사람들을 마지못해 참아내는 대신, 이기적인 마음들을 위축시키는 모든 약점에 대해 넓은 마음으로 너그러운 연민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해질수록 불완전함에 관대해집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죄 많은 여자들을 참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크나큰 온유함으로 선대하셨습니다. 더 이상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게 되면, 아무것에도 지치지 않고 거슬리지 않는 이 하나님의 위대하심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 이처럼 자유롭고 넓은 마음을 갖게 될까요? 미덕에 대한 섬세한 감각에서 나온다고 여겨지는 예민함은 사실 그보다는 자신에 갇혀 있는 좁은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의 것이 됩니다. 아직 자신이 주인 노릇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타인에게도 아주 조금밖에 열려 있지 않으며, 자신에게 집착할수록 그 조금은 더욱 적어집니다. 화평과 진리, 단순함, 자유, 순수한 믿음, 사심 없는 사랑이 당신을 온전한 번제물로 삼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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