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메카드 보여 주겠다며 새끼 손가락 마주걸고 약속한 사이라 엊저녁은 군소리 없이 휴대폰을 넘겨주었더랬다. 예준이는 코코 관람 중인 형아 누나들을 등지고 비장한 각오로 홀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아이는 그렇게 한참 동안 터닝메카드 삼매경에 잠겼더랬다. 그리고 우리는 어둡고 후미진 구석에서 부동의 자세로 터닝메카드에 탐닉하고 있는 다섯 살 배기 뽀시래기의 존재를 잠시 망각했다.
그 시각 막간 간식으로 삶은 계란 대 여섯 개를 커팅해서 가져왔다. 아이들은 게 눈 감추듯 흡입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정전도사는 그 후로도 서너 번을 되풀이 해 삶은 계란을 공수해 왔다. 이십여 분쯤 지났으려나? 문득 등줄기에서부터 스물스물 올라오는 한기에 구석진 자리를 황급히 응시했다. 거기에는 이미 터닝메카드와 혼연일체를 이룬 예준이가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구령의 열정에 가득찬 정전도사는 전방 45도를 향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초속 10미터로 내달렸다. 이미 터닝메카드의 노예가 된 예준이에게는 저항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팔, 다리를 만져 보아도 반응이 없었고, 동공은 풀려 있었으며, 아이의 영혼은 안드로메다 어딘가를 항해하고 있었다. 아이의 맥 풀린 손에서 휴대폰을 수거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후 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까지는 꼬박 십분이 걸렸다.
부흥회 마칠 즈음 아이들 틈바구니 속에 뒹굴거리는 예준이를 다시 찾아갔다. 정신무장을 단단히 시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야무지게 옷을 입히며 형아로서의 정체성을 몇 번씩 상기시켰더랬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초특급 슈퍼 울트라 형아로서의 절개와 기상을 잃어선 안 된다고.
초미세먼지를 뚫고 무사히 집에 안착한 정전도사는 목욕재개를 하고 유튜브 어플을 열었더랬다. 거기에는 완결되지 못한 영상이 재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준이의 좌절된 시청 연장의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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