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건 이후 서울에서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신군부 퇴진’과 ‘계엄철폐’를 외치며 민주화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군부가 곧 행동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였다. 그러자 대학생 간부들은 신군부가 이를 정권 탈취의 빌미로 삼을 것을 우려해 시위 중단을 결정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비상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서울의 봄은 힘없이 막을 내렸다.
한편 광주에서는 계엄 확대를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을 막고 등교를 저지하며, 거세게 항의하는 학생들과 이를 만류하는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구타하고 연행했다. 이후 사람이 조금이라도 모일라치면 계엄군은 위협과 폭력을 행사해 강제로 해산시켰다.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으로 구타당한 시민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자 분노한 시민들은 거세게 저항하며 점점 집단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자 5월 19일 새벽 광주역을 통해 계엄군이 증파되었고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과 시민군이 격렬하게 대치하며 충돌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현 상황을 왜곡 보도하던 광주 MBC 건물이 불타기도 했다.
1980년 당시 우리 엄마는 학구열을 불태우며 외교관을 꿈꾸던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화순에서 광주로 통학했던 엄마는 휴교령이 떨어진 후 줄곧 화순에 머물러 있었다고 했다. 내 부모가 그 험악한 시절을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에 어린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난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때 광주에서는 계엄군에게 처참히 살해된 시민들의 시신이 장기가 노출된 채 아스팔트 도로 위에 켜켜이 쌓여 갔고, 동네 골목마다 코를 찌르는 최루탄 냄새에 집집마다 안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다. 무정부 상태의 고립된 광주에서 어떤 이들은 지역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내 스스로 무장했고, 어떤 이들은 광주의 참상과 정황을 적극적으로 기록하고 알렸으며, 어떤 이들은 주먹밥과 빵을 만들어 시민군에게(심지어 계엄군에게도) 나누었고, 어떤 이들은 대치현장을 수습했고, 어떤 이들은 부상자를 돕기 위해 헌혈에 동참했다.
부상자를 위한 헌혈 행렬에 동참했다가 숨진 전남여상 3학년 박금희 열사도 우리 엄마 또래의 여고생이었다. 수혈할 혈액이 부족하다는 호소 방송을 듣고 기독병원으로 달려가 헌혈에 참여했던 그녀는 귀가하던 중 도로변에서 계엄군의 총격에 배를 맞고 불과 한 시간 만에 시신으로 되돌아왔다. 박 열사는 필자를 신안교회 고등부에서 2년 동안 지도해주신 K 선생님의 단짝 친구이기도 했다. 부잣집 딸로 남 부러울 것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던 선생님은 그해 오월의 충격으로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고 하셨다.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이른 나이에 곧바로 시집을 가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셨다. “금희가 너무 불쌍했어... 착하기만 했던 내 친구 금희가 왜 그렇게 황망한 죽음을 당해야 했는지...” 내 혈육과 친인척이 잔혹한 국가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 어떤 이들은 공포에 떨었고, 어떤 이들은 분노로 저항했다. 이 끔찍한 비극 앞에서 태연하게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고등학교 은사님께서 언젠가 한 번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당신께서는 5.18 당시 전남대학교 국문학과 재학 중이셨는데 그해 오월 동료 선후배들의 희생과 죽음 앞에서 자신은 너무도 무력했다고. 당신께서는 평생 그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사셨다고. 전대 극회를 통해 연극을 시작하게 된 것도, 살레시오여고 연극반을 지도하게 된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당신께서는 연극의 사회적 기능과 교육이라는 매체를 통해 부채의식을 갚고 싶으셨다고. 그해 오월 같은 광주 하늘 아래 호흡했던 이들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임의식과 부채의식을 끌어안고 남은 생을 살아왔다.
나는 그들의 다음 세대였다. 5.18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는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기억을 전수 받거나, 나처럼 공교육과 현장학습을 통해 그날의 참상과 의의에 대해 배웠다. 나만 하더라도 거의 매년마다 사생대회나 백일장 장소로 망월동 국립묘지(5.18 국립묘지)를 찾았다. 학원이나 학교 수업시간엔 그날에 대한 선생님들의 생생한 증언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증인들은 5.18에 대한 다양하고 특수한 개인의 기억을 수집 보존하여 공동의 기억으로 승화시켰다.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이 되어 다음 세대에 전수되기까지 누군가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누군가는 기록 수집 및 보존을 위해, 누군가는 ‘기억의 터’ 조성을 위해, 누군가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통한 기억의 재생산을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기억이라는 것이 단순히 과거지향적인 행위만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인 동시에 오히려 미래지향적인 행위에 가깝다. 집단 기억은 그 자체로 그것이 공동체가 되새겨보아야 할 인류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5.18을 이념갈등과 지역감정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면서 그 정신을 은폐하고 축소해 온 일련의 시도들은 규탄받아 마땅하다 생각한다. 5.18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단지 희생자나 유가족 또는 광주시민만의 5.18이 아니라 세계시민의 유산으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39년이 지난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5.18은 어떤 의의가 있을까?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에 게재된 5.18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의의로 자답을 대신하며 첫 번째 글을 맺고자 한다.
“5·18민주화운동은 불의한 국가 권력이 국민의 존엄성을 유린하고 권리를 짓밟을 때,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이며 반인권적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의한 국가권력에 저항했던 광주시민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이를 국제사회가 공인한 것이며, 5·18민주화운동에서 나타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민주, 평화의 정신을 지구촌 모든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5·18의 역사성과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담고 있는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동아시아의 작은 분단국가 대한민국에서 군사정권의 폭압에 대항한 시민들의 분노, 눈물 그리고 용기 등이 세계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이를 계기로 5·18민주화운동은 전 세계가 인권·민주주의·법치 등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가치로 가슴에 새기고 정의를 지향하는 인권 교육의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사유의 편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5.14. 자기합리화와 자기객관화 사이의 미묘함 (0) | 2020.05.19 |
---|---|
강자의 먹잇감이 될 바에야 (0) | 2019.03.21 |
현애 단상 (1) (0) | 2018.11.24 |
Mansplain (0) | 2018.11.15 |
성격 유형 (0) | 2018.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