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년이라는 시간은 자못 궁금한 눈초리로 "팔에 상처가 왜 그렇게 많아요?"라고 무심코 묻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는 걸 터득하기에 충분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닌 흉터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은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얘기하자면 길어." 그렇게 딱 잘라 말하곤 했다.
'나는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니야. 그리고 이건 엄밀한 의미에서 상처가 아니라 흉터야.' 상처와 흉터는 다르다. 상처가 현재진행형이라면 흉터는 현재완료형이다. 상처가 아문 자리에 남는 게 흉터다. 굳이 감출 필요도, 들출 필요도 없지만 나는 상처보다는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죄송하지만 질문이 틀렸어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흉터라고 생각한다. 주홍글자 'A'처럼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고도 생각한다. 문제는 나만 괜찮지 타인의 눈에는 영 거슬린다는 거다. 나도 타인의 시선 따위 가볍게 무시할 수 없는 천생 동양인인가 보다. 적잖은 나이도 한몫했겠다. 성숙을 요구하는 사회적 나이에 흉터가 어울리지 않았다. 거금을 들여 흉터 치료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랬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되고 싶은 마음 절반, 타인의 시선을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꼭 절반이었다.
병원은 회사에서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였다. 퇴근 후 예약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시술 부위에 마취크림을 바르고 20~30분 정도 누워 있었다. 치료실로 이동해서는 시술 전 사진을 촬영했다. K 선생님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오늘 받을 시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레이저 시술과 흉터 주사를 병행했는데 통증을 잘 참는다며 칭찬해 주셨다. 낯설지 않은 통증이다. 상처가 회복되는 과정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통증을,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느끼게 되다니 기분이 묘하다.
첫 번째 치료를 마치고 오랜만에 신촌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나는 그대로인데 거리는 꽤 변했구나 싶었다. 홍익문고에 들러 책도 한 권 샀다. 꼭 2008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회상에 잠겨 거리를 걷는 동안 이따금씩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회복, 그 이상의 단계가 있다는 걸 나는 왜 이제야 깨닫게 된 걸까. 어쩌면 지금까지 불편한 과거를 회피해 왔던 건 아닐까? 자기객관화라고 믿어 왔던 게 사실은 자기합리화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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