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논문에서 얻은 인사이트 하나에도 각주 처리를 하신다는 노교수를 존경했다. 학생들의 과제물 및 소논문에서 발견한 다듬어 지지 않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교수 개인의 통찰력으로 둔갑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므로. 권력관계에서 마땅한 몫의 분배라는 정의의 기본 원리 따위는 늘 약자의 의무였으므로.
착각이길 바란다. M.Div 졸업 논문이 얼마만큼의 완성도와 학술적 가치가 있겠냐만, 나는 모 교수의 설교 및 최근 몇 권의 저서에서 내 논문의 흔적이 엿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적어도 최근 10년간 강의나 저술을 통해 그가 보여준 종말론에 대한 이해는 매우 빈약했으므로. 뿐만 아니라 그는 이미 화려한 전적이 있었으므로. 그는 왜 갑자기 종말론 전도사가 되었을까? 내가 인지한 바에 따르면 정확히 작년 1월을 기점으로.
타인에 의해 값싸게 소비되는 글 따위... 쓰기 싫어졌다. 나는 '너'가 아니라 '그것'이 되었다. 존재와 시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상관관계, 종말론과 시간론, 영원과 시간, 생(生)과 사(死)의 불분명한 경계... 연속되는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내겐 실존에 대한 문제였다. 故 박홍례 여사께 바치는 헌가이기도 했으며, 애증의 공동체에 보내는 애가이기도 했다... 강자의 먹잇감이 될 바에는 사장시키는 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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