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석양이 현해탄 물구비에
불을 뿌리고 있었읍니다.
이제 막 닻을 내린 거룻배 위에는
저승의 뱃사공 칼롱의 은발이
석양빛에 두어 번 나-부-끼-더-니, 동서남북
금촉으로 부서지며 혼비백산
숲에 불을 질렀읍니다.
으-아, 솔바람 불바람 홀연히 솟아올라
둘러친 세상은 넋나간 아름다움
넋나간 욕망으로 끓어 오르고 있었읍니다.
아세아를 건너지른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에 당도한 건 바로
이때입니다.
오그덴 10호*는
몇 명의 수부들을 바다 속에 처넣고
벼락을 때리며 외쳤읍니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안락한 처마 밑에서
함께 살기를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희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치상에서
주린 배 움켜 쥐던 우리들의 아벨
우물가에서 혹은 태평 성대 동구 밖에서
지친 등 추스르며 한숨짓던 아벨
어둠의 골짜기로 골짜기로 거슬러 오르던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믿음의 아들 너 베드로야
땅의 아버지 너 요한아
밤새껏 은총으로 배부른 가버나움아
사시장철 음모뿐인 예루살렘아
음탕한 왕족들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야
너희 식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침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의 교회당과 아벨을 바꿨느냐
독야청정 담벼락과 아벨을 바꿨느냐?
회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
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 고통을 짊어진 아벨
너희 족보를 짊어진 아벨
너희 탐욕과 음습한 과거를 등에 진 아벨
너희 자유의 멍에로 무거운 아벨
너희 사랑가로 재갈물린 아벨
일흔 일곱 날 떠돌던 아벨을 보았느냐?
아흔 아홉 날 한뎃잠을 청하던 아벨을 보았느냐?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
바람들이 달려와 성벽을 허물리라
지진이 솟구쳐 빗장을 뽑으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
오 불쌍한 아벨
외마디 소리마저 빼앗긴 아벨을 위하여
나는 너희 식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아방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별장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교회당과 종탑을 엎으리라
소돔아 너를 엎으리라
고모라야 너를 엎으리라
가버나움아 너를 엎으리라
예루살렘아 너를 엎으리라
천사야 너도 엎으리라
깃발을 분지르고 상복을 입히리라
생나무 마른 나무 함께 불에 던지고
바다더러 산 위로 오르라 하리라
산더러 너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울지 않는 종은 입에 칼을 물리고
뛰지 않는 말은 등에 창을 받으리
날지 않는 새는 뒤축에 밟히리
뒷날에 참회는 적당치 못하다
너희가 쫓아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어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고 부인한 아벨
너희는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시치미뗀
아벨의 울음 소릴 들었느냐?
금동이의 술잔에 아벨의 피가 고이고
은소반의 안주에 아벨의 기름이 흐르도다
촛농이 녹아 흐를 때 아벨이 울고
노랫가락 높을 때 아벨이 탄식하도다
오 불쌍한 아벨을 찾을 때까지
나는 이 세상 어디든 달려가
너희 잔치상과 보신탕을 엎으리라
너희 축복과 토룡탕을 엎으리라
너희 개소주와 단잠을 엎으리라
돌들이 일어나 옥답을 일구고
지진이 솟구쳐 평지 풍파 일으키리라
바람더러 주인이라 주인이라 부르리라
너희의 어둠인 아벨
너희의 절망인 아벨
너희의 자유인 아벨
너희의 멍에인 아벨
너희의 표징인 아벨
낙원의 열쇠인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그때 한 사내가
불 탄 수염을 쥐어 뜯으며
대지에 무릎을 꿇었읍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읍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동안만이라도
주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다음날 신문은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의 대기권을 완전히 떠나갔다고
보도했읍니다.
*창세기 4장 2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첫아들 카인과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농부가 되었는데, 형 카인은 아벨에 대한 질투 때문에 아우를 들로 꾀어내어 쳐 죽였다. 이때 야웨께서 이렇게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981년 8월 초 한반도에도 상륙한 태풍 이름
- 고정희(시인, 1948-1991), '이 시대의 아벨'(<이 시대의 아벨>(문학과 지성사, 1983) 수록)
Marc Chagall, "Peace And The Further Reign Of Jerusalem In Prophecy Of Isaiah(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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