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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나는 나의 갖가지 감각이 깊이 잠겨드는》

by 아나빔 2018. 11. 26.

나는 나의 갖가지 감각이 깊이 잠겨드는
내 존재의 어둑한 시간을 사랑한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옛 편지에서처럼
이미 살았던 나의 일상생활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전설처럼 아득하며, 잘 극복되었음을 알았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깨닫는다.
시간을 초월한 두 번째의 널찍한 삶이 나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때때로 나는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소년이 슬픔과 노래 속에서 잃어버린 꿈을,
그 꿈을 무덤 위에 살려내는 나무, 다 자라서 와삭거리는 (따듯한 뿌리가 무덤 속의 소년을 감싸고 있는)
그런 나무와 같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나는 나의 갖가지 감각이 깊이 잠겨드는’(<릴케시집>, 초기시집 (송영택 역, 문예출판사, 2014)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