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약자들 in Chongshin Theological Seminary
총신에 적을 둔지 올해로 6년 째다. 성적 장학금의 대부분은 총총이 받을 정도로 성실한 태도로 학업에 임함에도 불구하고 낙인 아닌 낙인이 찍혀 동네 북이 된 총총에게, 몇몇 교수님들은 으레 신대원에 입학할 때부터 너희는 5학년이 아니니 조금 안다고 으스대지 말라는 말씀을 귀에 가시가 박히도록 하시지만, 죄송스럽게도 총신에서의 내 정체성은 총신 6학년이다. 신대원에서의 1년은 학부 4년과 많은 부분이 달랐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전도사님"이라는 호칭과 학급체제, 기숙사 생활과 동기들의 연령대 등등이 그러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신학은 교단 신학의 색채가 더욱 농후했다. 또한 나는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앞으로 사역자로서 혹은 신학자로서 합동 교단의 변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기관사역을 하지 않는 이상 웬만한 중형교회 이상에서는 현실적으로 중고등부나 청년부 사역을 맡기 힘들 것이다. 결혼이라도 하면 내가 갈 수 있는 유초등부 사역지는 더 줄어들 것이다. 아마 유치부나 영유아부 사역을 하다가 40대가 넘어가면 심방 전도사로 자리를 옮기게 될 것이다. 부서 전문 사역이 하고 싶으면자기 역량을 부단히 갈고 닦아야만 가능하다. 만약 내가 외국 유수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총신에서 교수로 임용될 확률은 희박하다. 현재 학부 신학과랑 신대원을 통틀어 여교수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그러한 가정에 무게를 실어준다. 여성 목사 안수 불허의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이 여교수 채용을 불허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 여성 교직원의 경우 여성이 남성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승진에서 배제된다는 이야기도 풍문으로 들었다. 총신과 장신의 교수의 성비와 교직원 중 과장의 성비를 비교해보면 참 재밌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학교 안에 만연된 여성차별의 관행에 길들여진지 오래라 사실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도 못한다. 어떤 교회의 성도들의 성비가 총신의 여원우나 여교수 혹은 여과장의 성비와 같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그 공동체를 건강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공동체에서 또 한 가지 의아했던 부분은 신대원의 전도사들 대부분은 요즘 젊은이 답지 않게 조용하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이상형으로 꼽는다는 점이다. 남성에게 순응적이면서도 기꺼이 헌신적인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그런 여성을 찾으시는 것 같다. 기성 교회에서 뵙던 헌신적인 사모님의 이미지가 투영된 부분도 없잖아 있는 것 같은데 이마저도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동역할 수 있는 여성"이라는 말을 풀이하면, 최소한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가계를 책임지고 가사와 육아를 전담할 수 있는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묻고 싶다. 여성이 한 사람의 인생이나 가정 혹은 사역에 흡수되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하는 올바른 사랑은 서로를 꽃 피워주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합동교단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성역할에 대한 보수적인 고정관념에 갇혀 있다. 이는 여성 목사 안수 허용의 문제 이전에 교회 내 여성의 역할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일례로 식사 준비와 설거지는 권사님이나 여집사님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사회에서 퇴출되어 가고 있는 한국의 전통적 가부장중심주의가 신앙의 옷을 입고 교회 공동체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성역할에 대한 보수적인 고정관념은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왜곡시킨다. 과연 젊은 여성들에게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남녀를 무론하고 성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교회의 구조도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B 교수님의 해고에 대한 소식은 16년 1학기 시간표가 뜨면서 반톡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대부분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그분의 거침없는 행보 앞에서 무력감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일방통행과 불통은 푸른 기와뿐만 아니라 양지에도 짙은 그늘을 드리운지 오래다. 나의 경우, 하도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장탄식만 늘어놓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감정 소비에 지친 탓인지 공동체 내에서 발생한 불의에 대한 분노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학습된 무기력은 올바름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극심한 피로와 함께 사안에 대한 해결 의지도 꺾어버린다. 문제 해결에 대한 책임과 노력을 타인에게 전가시키고 익명의 다수 속으로 몸을 숨기는 나는 자발적 노예근성에 물들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의 인사 전횡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며칠 전에는 드디어 이 사건이 기사화되어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비민주적인 학교 행정과 김영우 총장의 인사전횡에 대한 문제를 여성 목사 안수 허용의 문제로 환원시킨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 여성 목사 안수 허용과 불허의 프레임 전쟁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대원의 다수인 남자 전도사님들의 심정적 동의도 얻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여성의 문제로 치환하기 이전에 약자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에 보다 더 주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여원우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료 교수님들과 B 교수님께 배움 받은 남원우들이 총신 공동체 내에서 발생한 불의에 대해 함께 부끄러움을 느끼며 목소리를 내야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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