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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일지/H

이름 되뇌기

by 아나빔 2016. 11. 27.

2013년 겨울, H교회 면접보던 날, 낡고 오래된 교회 외관을 보고는 밖에서 머뭇거리며 한참을 서성였다. 잠시, 말없이 집으로 조용히 돌아가려는 마음을 먹어 보기도 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약속한 시간이 다 됐다. 목사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적어도 인사는 드려야한다. 그때만 해도 내가 헌인교회 문턱을 다시 밟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교회 사무실로 걸어 들어 갈 때의 내 마음이 꼭 그랬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마을에서 어린이 사역이라니! 나는 못할 것 같다.

그런데 불편하다. 마음이 아주 불편하다. 면접을 마치고 털레털레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는 내내 면접을 보던 자리에서 최장로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는 적지만 전도사님이 이 아이들 최선을 다해 가르쳐주시면 하나님께서 그거 기쁘게 받으실 겁니다." 그만큼의 믿음이 내게는 없구나. 그게 내 현주소구나. 만약 내가 이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된다면 나는 얼마만큼 성과를 낼 수 있을까? 패배감이 몰려오지는 않을까? 내가 과연 그걸 이겨낼 수 있을까?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쯤이었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멘토 선배 왈 "우리는 그저 마음을 쏟으러 가는 사람이야.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면 돼. 현애야, 그 교회 참 건강하고 좋은 교회다. 가라!" 그분의 음성으로 듣고 아멘으로 화답했다.

처음 H교회 성도님들께 인사드리던 날, 예배당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성도님, 머리가 하얗게 샌 성도님들이 여럿 계셨다. 그래서인지 우리 교회 예배 분위기는 참 남달랐다. 오후 찬양 예배 시간이면 성도님들은 고즈넉이 앉아 담담한 목소리로 찬양을 드리곤 하셨다. 이따금씩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훔치기도 하셨는데 그 모습은 마치 한폭의 성화 같았다. 나는 그 예배가 참 좋았다. 찬송가 가사와 곡조의 깊이를 오롯이 담아내는 어르신들의 목소리도 참 좋았다. 강한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교회를 여전히 붙드시는 분, 그분이 여기 계시구나!

아늑했다. 번잡한 도시와 동떨어져 있는 이 마을은 참 아늑했다. 시원하게 쭉 뻗은 나뭇가지가 하늘을 간지럽히는 광경이, 이름 모를 새들이 날갯짓하며 지저귀는 소리가 참 아름다웠다. 금요일이면 짙은 밤하늘 위에 듬성듬성 놓인 빛나는 징검다리를 따라 예배당에 올라가곤 했다. 풀벌레 소리, 개구리 울음 소리, 바람에 잎사귀 부대끼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동네 개짓는 소리. 봄이면 향긋한 꽃내음, 여름이면 습윤한 풀내음, 가을이면 만추의 고독한 대지를 품는 따사로운 햇살, 겨울이면 서릿발 칼날진 겨울 바람과 눈길 위에 뽀드득 새기던 발자국. 매순간 빛의 세례를 받는 시공간을 거니는 것 같았다.

그 아름다운 순간을 아이들과 함께 했다. 생애 처음으로 만나는 전도사가 정현애 전도사라니! 나는 참 큰 복을 받았다. 애들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신줄을 놓을 수 없어서 빠짝 잡고는 있지만 툭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보가 터질 것 같다. 정화섭 장로님, 최용석 장로님, 유현준 장로님, 공성훈 목사님, 해인이, 영민이, 하영이, 현민이, 하민이, 선우, 찬영이, 혜인이, 선아, 채은이, 동민이, 동윤이, 강양순 권사님, 이미옥 선생님, 김은주 집사님, 조원회 사모님, 김영주 집사님... 후-하고 바람이 불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멍하니 앉아 강박적으로 이름만 되뇌고 있다. 3년이나 있었는데 성함을 모르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니! 나는 더 뜨겁게 사랑했어야 했는데... 나는 더 뜨겁게 사랑했어야 했는데... 기어코 오늘이 오고야 말았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랑 연배가 비슷한 성도님들께서 그동안 수고했다고 토닥이며 안아 주시는데 아무리 힘껏 웃어 보여도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좀처럼 내 멋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전도사로 살면서 가장 서러운 순간은 오늘 같은 날이다. "떠나는 사람은 이별 앞에 덤덤해져야 한다. 정현애! 너는 프로다! 아마추어처럼 울지 말자!"하고 채근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나는 언제쯤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를 떠나 보내고 누군가를 떠나올 수 있을까. 침울하다. 유치하고, 부끄럽고,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감상적인 밤이다. 일주일만 파업하고 쉬고 싶은데 아쉬워하거나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는 또 밀린 과제 앞에 앉아 있구나.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후임 전도사님이 빨리 오셔야 한다.

#뭣이_중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