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한 존재입니다." 살레시오 수도회의 설립자이자 가난한 청소년 교육에 헌신했던 사제 돈 보스코의 말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나는 너희를 위해 공부하고, 일하며, 너희를 위해 살 거란다. 너희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돼 있단다." 그는 직업학교와 공동작업장 등을 세워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청소년들을 지속적으로 돕기 위해 마음을 같이하는 자들과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돈 보스코는 청소년 사목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오라토리오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오라토리오는 청소년들을 맞아들이는 집이고, 삶을 준비하는 학교이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만남의 장소이자 놀이의 장소였다. 이는 오늘날 이탈리아 교회에 뿌리내려 동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방과 후 교실이나 놀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오라토리오는 본래 기도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오라토리움 Oratorium에서 나왔다. 돈 보스코의 청소년 사목의 방향은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의 실현에 있었다. 이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그가 제시한 것이 집, 교회, 학교, 운동장 역할을 하는 청소년 공동체 오라토리오였다.
이오덕 선생은 아동문학은 입시와 경쟁위주의 공교육에서 오는 악영향을 해독하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바꿔 말하면 인간다움의 회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개념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다움의 범위를 우주적으로 확장시킨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에 적합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일학교라는 용어 자체가 오늘날 개신교의 어린이•청소년 영성 사목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주일학교는 교역자나 교사를 통해 가르침을 받는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건 아닐까? 한국교회의 다음세대 교육에 대한 고민은 어린이•청소년 공동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교회학교는 비단 가르치는 공간일 뿐 아니라 아이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삶으로 살아내는 공간이어야 한다. 돈 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서 다음세대 신앙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을 맞아들이는 집이고, 삶을 준비하는 학교이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만남의 장소이자 놀이의 장소로서의 어린이•청소년 신앙 공동체!
본론
몇달 전 동서울 노회 글짓기 대회에서 즐거운 우리교회라는 주제로 하민이가 쓴 글의 제목이 "우리들의 놀이터, 교회"였다. 순간적으로 불경스럽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신앙교육은 뒷전이고 교회에 와서 실컷 놀게 방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까? 문득 신앙교육이 우리 아이들의 삶과 사고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또 놀이터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은 신학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지에 대해서도.
행복이라는 단어는 희랍어 eudaimon이다. 파자하면 좋은 신이라는 의미이다. 희랍인들에게 행복은 좋은 신과 함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경은 그 신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 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라고 말한다. 복은 인간의 본성과 궁극적인 목적을 의미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만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라고 답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계명의 테두리 안에서 그분을 즐기는 것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며 행복인 것이다.
프뢰벨은 "놀이는 이 단계에 있는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정신적인 활동이며, 동시에 인간과 모든 사물의 내부에 숨겨진 자연적인 삶의 전형적인 인간의 삶"이라고 하였다. 놀이는 인간의 본성 즉 인간다움의 구현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카플란은 "연구의 최고 형태는 본질적으로 놀이"라고도 하였다. 놀이는 학습과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는 사람은 놀이를 통해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놀이 과정에 인생에 대한 관점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투영한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습득하고 놀이를 통해서 그 내용을 살아낸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놀이 자체는 안식과 닿아있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창조의 완성은 안식이었다. 안식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그들에게 하신 약속의 표현이었다. 구약에서 안식은 하나님의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는 쉼에 대한 신앙 고백이며 사회적으로 규례화된 제도이다. 이사야서 기자는 안식일을 "즐거운 날(사 58:13)"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는 즐거울 것(사 58:14)이라고 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안식일은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되어 폐지되었다고 밝힌다. 개신교는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통해 안식일의 의미를 구현해나간다. 안식일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쉼을 통해 비움과 채움과 만남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날이다.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 그리고 경쟁에 대한 저항이다.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고백하며 감사드리는 날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입시와 경쟁 위주의 교육으로부터,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의 구조체계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해야한다.
결론
주일학교는 가정과 학교 그리고 교회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인격적 만남의 장이자 놀이터여야 한다. 어떻게 보면 교역자는 신앙이 아이의 삶과 놀이의 영역에 까지 확장될 수 있도록 돕는 자로 세움 받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형상이 전인격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돕는 곳이 교회인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교회에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맛보고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하다는 그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아이들은 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하다. 모든 아이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풍성한 사랑 안에서 놂과 앎과 쉼과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다음세대 신앙교육을 위해 교회는 신앙의 전수자를 훈련시키고 교회의 오라토리오적 기능의 활성화를 도모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을 기준으로 예장합동의 65퍼센트, 예장통합의 50퍼센트는 교회학교를 운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음세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증가하는데 문을 닫는 교회학교는 늘어만 간다.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교회 신앙교육의 목표에 대한 재고일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전인격적인 구현의 범위와 실현 방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돈 보스코의 청소년 사목의 지향점과 그 사역에 있어서 오라토리오의 역할이 한국교회의 주일학교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여러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한 존재입니다." 살레시오 수도회의 설립자이자 가난한 청소년 교육에 헌신했던 사제 돈 보스코의 말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나는 너희를 위해 공부하고, 일하며, 너희를 위해 살 거란다. 너희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돼 있단다." 그는 직업학교와 공동작업장 등을 세워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청소년들을 지속적으로 돕기 위해 마음을 같이하는 자들과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돈 보스코는 청소년 사목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오라토리오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오라토리오는 청소년들을 맞아들이는 집이고, 삶을 준비하는 학교이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만남의 장소이자 놀이의 장소였다. 이는 오늘날 이탈리아 교회에 뿌리내려 동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방과 후 교실이나 놀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오라토리오는 본래 기도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오라토리움 Oratorium에서 나왔다. 돈 보스코의 청소년 사목의 방향은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의 실현에 있었다. 이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그가 제시한 것이 집, 교회, 학교, 운동장 역할을 하는 청소년 공동체 오라토리오였다.
이오덕 선생은 아동문학은 입시와 경쟁위주의 공교육에서 오는 악영향을 해독하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바꿔 말하면 인간다움의 회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개념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다움의 범위를 우주적으로 확장시킨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에 적합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일학교라는 용어 자체가 오늘날 개신교의 어린이•청소년 영성 사목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주일학교는 교역자나 교사를 통해 가르침을 받는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건 아닐까? 한국교회의 다음세대 교육에 대한 고민은 어린이•청소년 공동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교회학교는 비단 가르치는 공간일 뿐 아니라 아이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삶으로 살아내는 공간이어야 한다. 돈 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서 다음세대 신앙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을 맞아들이는 집이고, 삶을 준비하는 학교이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만남의 장소이자 놀이의 장소로서의 어린이•청소년 신앙 공동체!
본론
몇달 전 동서울 노회 글짓기 대회에서 즐거운 우리교회라는 주제로 하민이가 쓴 글의 제목이 "우리들의 놀이터, 교회"였다. 순간적으로 불경스럽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신앙교육은 뒷전이고 교회에 와서 실컷 놀게 방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까? 문득 신앙교육이 우리 아이들의 삶과 사고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또 놀이터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은 신학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지에 대해서도.
행복이라는 단어는 희랍어 eudaimon이다. 파자하면 좋은 신이라는 의미이다. 희랍인들에게 행복은 좋은 신과 함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경은 그 신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 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라고 말한다. 복은 인간의 본성과 궁극적인 목적을 의미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만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라고 답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계명의 테두리 안에서 그분을 즐기는 것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며 행복인 것이다.
프뢰벨은 "놀이는 이 단계에 있는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정신적인 활동이며, 동시에 인간과 모든 사물의 내부에 숨겨진 자연적인 삶의 전형적인 인간의 삶"이라고 하였다. 놀이는 인간의 본성 즉 인간다움의 구현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카플란은 "연구의 최고 형태는 본질적으로 놀이"라고도 하였다. 놀이는 학습과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는 사람은 놀이를 통해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놀이 과정에 인생에 대한 관점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투영한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습득하고 놀이를 통해서 그 내용을 살아낸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놀이 자체는 안식과 닿아있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창조의 완성은 안식이었다. 안식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그들에게 하신 약속의 표현이었다. 구약에서 안식은 하나님의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는 쉼에 대한 신앙 고백이며 사회적으로 규례화된 제도이다. 이사야서 기자는 안식일을 "즐거운 날(사 58:13)"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는 즐거울 것(사 58:14)이라고 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안식일은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되어 폐지되었다고 밝힌다. 개신교는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통해 안식일의 의미를 구현해나간다. 안식일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쉼을 통해 비움과 채움과 만남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날이다.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 그리고 경쟁에 대한 저항이다.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고백하며 감사드리는 날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입시와 경쟁 위주의 교육으로부터,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의 구조체계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해야한다.
결론
주일학교는 가정과 학교 그리고 교회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인격적 만남의 장이자 놀이터여야 한다. 어떻게 보면 교역자는 신앙이 아이의 삶과 놀이의 영역에 까지 확장될 수 있도록 돕는 자로 세움 받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형상이 전인격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돕는 곳이 교회인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교회에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맛보고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하다는 그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아이들은 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하다. 모든 아이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풍성한 사랑 안에서 놂과 앎과 쉼과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다음세대 신앙교육을 위해 교회는 신앙의 전수자를 훈련시키고 교회의 오라토리오적 기능의 활성화를 도모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을 기준으로 예장합동의 65퍼센트, 예장통합의 50퍼센트는 교회학교를 운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음세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증가하는데 문을 닫는 교회학교는 늘어만 간다.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교회 신앙교육의 목표에 대한 재고일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전인격적인 구현의 범위와 실현 방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돈 보스코의 청소년 사목의 지향점과 그 사역에 있어서 오라토리오의 역할이 한국교회의 주일학교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