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호텔에서 어느날 일찍 잠이 깬 나는 창문 너머 새벽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씰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의 말이 생각났다.
내 시들은 동이 트기 전, 우유 배달부가 오기 전, 거의 영원에 가까운 푸른 새벽에 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원에 가깝게 푸르던 하늘빛은 어느덧 사그라저 밋밋한 회색으로 변해갔다. 이제 우유 배달차가 지나가고 번잡스러운 일상이 시작되는 아침이 올 것이다.
이 여행이 끝나면 나 또한 저 시끌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그러나 지저분한 건 오히려 삶인지도 모른다. 삶은 때로 우리를 속일지라도 생활은 우리를 속이는 법이 거의 없다. 그것은 때맞춰 먹여주고 문지르고 닦아주기만 하면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일상은 위대하다. 삶이 하나의 긴 여행이라면, 일상은 아무리 귀찮아도 버릴 수 없는 여행가방과 같은 것. 여행을 계속하려면 가방을 버려선 안 되듯, 삶은 소소한 생활의 품목들로 나날이 새로 채워져야 한다.
그 뻐근한 일상의 무게가 없으면 삶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 영원히 허공을 떠돌 것이다.
최영미, <시대의 우울>(창비, 1997), '런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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