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아카이브49 이정하,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 이정하(시인, 1962-), '낮은 곳으로'((푸른숲, 1997) 수록) 상황에 따라서는 무식하게 이기적인 시... 2017. 10. 4. 최영미, 《꿈의 페달을 밟고》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 최영미(시인, 1961-), '꿈의 페달을 밟고'((창작과비평사, 1998) 수록) 2017. 9. 12. 한강, 《그때》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 - 한강(시인, 1970-), '그때'((문학과 지성사, 2013) 수록) 2016. 12. 1. 신영복, '추석-아버님께'(<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수록) 추석 - 아버님께 추석이 다른 명절과 다른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부모님을 찾아뵙고, 형제들을 찾고, 조상을 찾아 산소에 성묘하는 등 추석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게 됩니다. 6, 7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로 말미암아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고향과 가족을 떠나서 객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제 때보다 그 수가 더 많다고 합니다. 이처럼 객지를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해마다 추석이 되면 엄청난 귀성인파가 되어 역이나 버스터미널에 운집합니다. 객지에서 고향으로 향하는 숱한 행렬은 흡사 뒤틀린 몸뚱이를 뒤척여 본래 자리로 돌이키려는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막상 추석이 되어도 이 거대한 행렬 속에 끼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산가족은 물론 가산을 정리해서 .. 2016. 9. 15. 정현종,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시인, 1939-), '방문객'((문학과 지성사, 2008) 수록) 2016. 8. 23.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 가르쳐줄래?" 고양이가 대답했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싶은가에 달려있겠지." "난 어디든 상관없어." "그렇다면 어느 길로 가도 상관없겠네." "어디든 도착만 한다면..." 고양이가 말했다. "넌 틀림없이 도착하게 되어 있어. 계속 걷다보면 어디든 닿게 되거든." "혹시 나는 갈 곳이 없는 건 아닐까?" "지도만 보면 뭐해? 남이 만들어놓은 지도에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있을 것 같니?" "그럼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 나와 있는데?" "넌 너만의 지도를 만들어야지." -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2016. 6. 4. 고정희, 《이 시대의 아벨》 며칠째 석양이 현해탄 물구비에 불을 뿌리고 있었읍니다. 이제 막 닻을 내린 거룻배 위에는 저승의 뱃사공 칼롱의 은발이 석양빛에 두어 번 나-부-끼-더-니, 동서남북 금촉으로 부서지며 혼비백산 숲에 불을 질렀읍니다. 으-아, 솔바람 불바람 홀연히 솟아올라 둘러친 세상은 넋나간 아름다움 넋나간 욕망으로 끓어 오르고 있었읍니다. 아세아를 건너지른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에 당도한 건 바로 이때입니다. 오그덴 10호*는 몇 명의 수부들을 바다 속에 처넣고 벼락을 때리며 외쳤읍니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안락한 처마 밑에서 함께 살기를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희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치상에서 주린 배 움켜 쥐던 우리들의 아벨.. 2016. 4. 23. 김현승, 《지각(知覺)》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김현승(시인, 1913-1975), '지각' ((창비, 1975) 수록) 2016. 4. 23. 이전 1 2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