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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편린

오방 최흥종 목사

by 아나빔 2014. 8. 1.
한국 최초 한센인 전문병원 설립자 오방 최흥종 목사(1880-1966)

오방 선생은 일제 강점기 빈민운동의 지도자로 광주 근대의 선각자이다. 오방에게는 광주 최초의 기독교 신자, 광주 최초의 장로, 광주 최초의 목사 외에도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광주 YMCA의 창립자이며, 현 여수 애양병원의 전신인 광주 나병원의 설립자이자 소록도 한센인촌의 창설자이다. 그는 허백련 화백과 농업전문교육을 시키는 "삼애(하나님, 이웃, 자연 사랑)학원"을 설립하는 등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5년 독립운동가들의 변절과 기독교계의 신사참배 결의에 실망한 그는 스스로 사망선고를 하고 무등산 자락으로 들어갔다. 그때 지은 아호 오방에는 그런 그의 결단이 묻어난다. 오방은 다섯 가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는 아호대로 가족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받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경제적으로 속박 받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5가지 신조를 평생 지키며 살았다.

1966년 향년 86세를 일기로 오방선생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는 광주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광주 시민들을 비롯해 광주 인근 걸인들과 무등산에서 내려온 결핵환자들, 여수와 나주 등지에서 올라온 한센병 환우들 수백명이 모여 통곡하며 애도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최망치'라는 별명으로 뒷골목에서 주먹 좀 휘둘렀던 그의 인생을 뒤집은 것은 두 번의 만남이었다. 유진 벨 목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얻게 되었고,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나 한센병 환우들을 돕는 자가 되었다.

한센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여인을 끌어안아 나귀에 태우고 가던 포사이드 선교사가 그에게 여인의 지팡이를 주워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피고름 묻은 지팡이를 바라보며 망설였던 그는 외국인보다 동포애 없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지팡이를 집어주었다. 성자의 지팡이로서의 그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만남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흘려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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