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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편린63

바람 한 점 없는 화창한 봄날에 정확히 일 년 전 오늘 아침, 아흔 둘 연세에도 정정하셨던 우리 외할머니 소천하셨다. 서울살이 십여 년을 제하고도 얼굴 맞대고 살 부대끼며 산 게 십여 년인데 풍경처럼 늘 그 자리에 계실 것 같던 분이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작별을 고하셨다. 외손주들 좋아하는 과일 한 봉지 손에 들고 문 앞에서 핸애야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환영처럼 생생한데 작고하신 지도 근 일 년이 되었다. 세상에 호상은 없다는 어른들 말씀이 허언이 아니었다. 손주만 스무 명이 넘는 대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오랜만에 일가친척이 마주 앉아 뜨뜻한 밥 한 끼하며 고인을 추상하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반가웠지만,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설움과 슬픔이 복받치지 않았겠는가. 상실은 분명 낯선 것이었다. 할머니.. 2018. 5. 17.
탁아의 추억 터닝메카드 보여 주겠다며 새끼 손가락 마주걸고 약속한 사이라 엊저녁은 군소리 없이 휴대폰을 넘겨주었더랬다. 예준이는 코코 관람 중인 형아 누나들을 등지고 비장한 각오로 홀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아이는 그렇게 한참 동안 터닝메카드 삼매경에 잠겼더랬다. 그리고 우리는 어둡고 후미진 구석에서 부동의 자세로 터닝메카드에 탐닉하고 있는 다섯 살 배기 뽀시래기의 존재를 잠시 망각했다. 그 시각 막간 간식으로 삶은 계란 대 여섯 개를 커팅해서 가져왔다. 아이들은 게 눈 감추듯 흡입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정전도사는 그 후로도 서너 번을 되풀이 해 삶은 계란을 공수해 왔다. 이십여 분쯤 지났으려나? 문득 등줄기에서부터 스물스물 올라오는 한기에 구석진 자리를 황급히 응시했다. 거기에는 이미.. 2018. 3. 28.
파편 속단하지 마시라. 파편이다. 내 사유도 글도 말도. 인격적인 교제없이 타인에 대해 알 수 없다. 나도 나를 잘 모른다. 나는 그저 파편에 불과하다. (파편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은 그분뿐이시다) 속단하지 마시라. 파편이다. 2017. 11. 5.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의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나-너의 관계(주체와 주체의 관계)'는 타인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전제하는 것으로 주체와 대상이라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상호 인정하는 주체적인 만남의 관계이다. 이 경우에 타인은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반면 '나-그것의 관계(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타인을 인격적인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타인을 사물과 같이 다루어 하나의 수단이나 조건으로 삼게 한다. 타인을 경쟁상대로 삼거나, 만인에 대한 경쟁구도 속에 집어넣고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거나, 이용가치에 따라 서열화시키는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이 경우에 겉사람과 겉사람의 피상적인 만남 속에서 타인은 자신의 .. 2017. 9. 21.
방관과 동조로서의 침묵에 대하여 제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 없지만... 내 경우에는 타인이나 공동체에 별로 관심이 없는 신학생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일반화에 불과하겠지만... 나라는 사람의 한계는 늘 이 지점과 맞물려 있다. 합동 교단에 10년 간 몸 담으며 나는 이 공동체에서 지나치게 의협심이 강한 오지라퍼를 맡고 있다. 피곤하게 사는 사람인 동시에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럴 때마다 나 역시 고구마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가끔은 제도에 편승한 직업인으로서의 종교인이 되려고 신대원에 다니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분명 내가 이해하는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자기 학점, 자기 사역, 자기 가정, 자기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전 우주적이라고.. 2017. 7. 11.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 '대통령 탄핵'을 결정한 헌법재판소의 선고문(전문) ​​ 지금부터 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선고에 앞서 이 사건의 진행경과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재판관들은 지난 90여일 동안 이 사건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왔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들께서도 많은 번민과 고뇌의 시간을 보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재판관들은 이 사건이 재판소에 접수된 지난 해 12. 9. 이후 오늘까지 휴일을 제외한 60여일 간 매일 재판관 평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재판과정 중 이루어진 모든 진행 및 결정에 재판관 전원의 논의를 거치지 않은 사항은 없습니다. 저희는 그 간 3차례의 준비기일과 17차례에 걸친 변론기일을 열어 청구인측 증거인 갑 제174호증에 이르는 서증과 열두 명의 증인, 5건의 문서송.. 2017. 3. 10.
첫 장을 넘기면 반드시 마지막 장을 넘겨야 한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삐까삐까 별의 또또", 생애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책 제목이다. 학교 숙제로 친구랑 둘이서 무등도서관 어린이실에 갔더랬다. 집에 어린이용 도서가 거의 없던 터라 당시 도서관 어린이실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 당시로 말할 것 같으면 국민학교가 이제 막 초등학교로 개명을 했고, 각 학교마다 급식실이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아직까지는 학급문고가 학교도서관의 역할을 대신하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그렇게 다양한 주제의 책을, 그렇게 다양한 장르로, 그렇게 많이, 그것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은 10살 짜리 소녀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제일 먼저 집어든 책은 위인전이었다. 백범 김구, 우장춘, 이순신, 헬렌켈러, 아브라함 링컨, 넬슨 만델라, 장영실, 나이팅.. 2017. 1. 3.
무기력 참담합니다. 자꾸 눈물 흐를 것 같아 멍하니 앉아만 있습니다. 2016. 9.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