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편린63 아이 귀여워 어제 주일예배 마치고 5시 조금 넘어서 성가대 회식이 있었다. 예약한 식당에서 2시간 만에 6살 짜리 목사님 딸을 다시 만났다. "전도사님!" "응 하영아?" "귀~여워!" "응?" "전도사님 귀~여워!" 수줍은 새악시 볼을 하고는 밥 먹는 내내 전도사님 귀여워를 연발하던 너! "아이 귀여워. 전도사님 귀여워!"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장하다 우리 공하영! 2015. 4. 6. 젊음 2007년 어느 여름 저녁, K와 신촌 지하 바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나눴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K는 꿈에 대한 간절함이 있던 20대 초반의 젊음이 아름답다 말했고, 나는 K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K의 자리에 서서 그때의 나를 바라본다. 반추해보면 젊음은 늘 새로움과 낯섦이라는 세계 그 자체였다. 나의 이십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설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그때는 K의 완숙한 젊음이 무척이나 부러웠던 것 같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K는 오전 8시에 출근해서 저녁 10시에 퇴근하는 연구조교 생활을 하며 외국계기업 취업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가끔 학교 앞 오락실에서 드럼스틱을 잡는 것 외의 일탈은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일종의 작은 저항이었다고나 할.. 2014. 11. 29. 오방 최흥종 목사 한국 최초 한센인 전문병원 설립자 오방 최흥종 목사(1880-1966) 오방 선생은 일제 강점기 빈민운동의 지도자로 광주 근대의 선각자이다. 오방에게는 광주 최초의 기독교 신자, 광주 최초의 장로, 광주 최초의 목사 외에도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광주 YMCA의 창립자이며, 현 여수 애양병원의 전신인 광주 나병원의 설립자이자 소록도 한센인촌의 창설자이다. 그는 허백련 화백과 농업전문교육을 시키는 "삼애(하나님, 이웃, 자연 사랑)학원"을 설립하는 등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5년 독립운동가들의 변절과 기독교계의 신사참배 결의에 실망한 그는 스스로 사망선고를 하고 무등산 자락으로 들어갔다. 그때 지은 아호 오방에는 그런 그의 결단이 묻어난다. 오방은 다섯 가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 2014. 8. 1. 헌신된 일꾼이 교회에 일찍 도착했습니다. 피아노 연습하러 주일학교실을 찾았습니다. 환하게 불을 켜고 문을 열자 어디선가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인기척에 당황한 곱등이 여섯 마리가 숨을 죽이고 제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피차 서로 대면하기가 껄끄러워서 한참 동안 멀뚱히 서있었습니다. 그때 용감한 녀석 한 마리가 정적을 깨고 바닥에서 뛰어올랐습니다. 이윽고 나머지 녀석들도 하나둘씩 동참했습니다. 도약하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저는 숨을 죽이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문을 닫고 올라왔습니다. 진정 곱등이 박멸을 위해 헌신된 일꾼이 필요합니다. 2014. 7. 19. 윤동주 생가 터 명동마을 용정에 들러 명동(明東 동쪽을 밝힌다)촌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규암 김약연 선생이 설교했던 명동 교회를 둘러보았습니다. 명동 교회는 윤동주 시인의 외숙 규암 김약연 선생이 1900년대 초에 세운 조선족 최초의 교회입니다. 김약연 선생을 주축으로 형성된 명동촌의 명동학교에서는 윤동주 시인, 라운규 감독(영화 아리랑 제작), 송몽규, 문익환 목사가 교육을 받았습니다. 간도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후학양성에 힘썼던 선조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명동 유년 주일학교와 십자가를 모티프로 한 명동학교의 교기가 인상깊었습니다. 3.1 운동에 이은 간도 3.13 만세 운동에서 선두에 선 사람들은 김약연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지도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나의 일생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긴 규암 .. 2014. 6. 29. 누군가의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언니, 오빠, 동생이 있습니다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고 나갈 준비를 합니다. 찜찜합니다. 다만 찜찜해서 오늘도 거리로 나갑니다. 생텍쥐페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가난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동료가 가져간 승리를 함께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돌을 가져다 놓으며 이 세상을 만들어 나아가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역시 개인의 한계상황 속에서도 저 자신에 대한 책임, 타인에 대한 책임, 세상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해보았습니다. 거리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나눠지고픈 사람들이 쭈뼛쭈뼛 모입니다. 직업, 학벌, 출신지역, 외모, 사상이 다 다른 사람들의 모임 속에.. 2014. 5. 10. 무제 지금 이 시간 여의도 KBS 별관 앞. 정중한 사과 한마디보다 공권력 투입이 쉬운 오늘의 대한민국. " 악덕재벌이 아니라 노동자를 보호해 주는 경찰, 건설업자가 아닌 철거민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경찰과 법원, 사회적 약자의 집회와 시위를 보장하고 지켜 주는 공권력을 보고 싶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지킴이, 인권보장의 든든한 보루인 공권력을···" http://m.ustream.tv/channel/facttv 2014. 5. 8. 국민들이 대신 나섭니다 저는 일하러 이만 물러갑니다. 종각역에 대기중인 전경(?)들입니다. 저는 현정부가 부정선거로 정권을 장악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게 적어도 지금은 확실해보입니다. 상담대학원 모 학생이 제 동의를 구하지 않고 석사학위 논문에 제 사례를 사용했습니다. 그 분 졸업후 6개월이 지나 제가 도서관 논문간행물실에서 발견했습니다. 학부 수업 중 의무적으로 교내 상담센터에 가서 상담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동안 그 학생은 제게 동의를 구하면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아 아무말없이 제 상담내용을 자신의 논문 취지에 맞게 가공하여 논문에 실었습니다. 제 사례 첫 장만으로도 저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한 정보들이 실려있었습니다. 저는 먼저 제 학부수업 담당교수님께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2014. 5. 3. 이전 1 ··· 3 4 5 6 7 8 다음